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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마지막 당부, 本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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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마지막 당부, 本分
  • 전민일보
  • 승인 2021.12.21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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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분하여 의분이 북받치니 내 가서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만나겠구다! 만나겠구다! 너 원수 놈 처단할 수 있겠구나!”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기 전날인 1909년 10월 5일 하얼빈에서 만나 주고받은 안 의사의 ‘장부가’에 거사 동지 우덕순이 화답한 ‘거의가’의 일부다.

러시아 재무장관과 이곳에서 회담하기로 예정된 이토, 그는 국모를 시해하고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등 한일병탄의 원흉이었다. 평소 뜻을 함께한 동지와 함께 조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하늘에 맹세한 ‘단지동맹(盟)'을 결성하고, 독립단체인 '대한의군(大輝)'을 이끌었던 안중근은 유동하 조도선 등과 거사를 계획한다.

이토가 인근 채가구역에서 환승할 것에도 대비했으나 낌새를 수상히 여긴 러시아는 이곳을 봉쇄하고, 기차는 하얼빈으로 직진한다. 새벽 7시에 기차에서 내려 맨 앞에서 사열대 앞을 지나는자가 이토임을 직감하고 5m 정도의 거리에서 그를 향해 권총 세 발을 발사하여 관통한다. 혹시 이토가 아닐 것에 대비하여 뒤따르는 자들에게 4발을 더 가격하여 모두 명중시켰다.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복부를 관통한 이토는 십여 분 후 대출혈로 절명했고, 일제의 심장을 타격하여 야수를 처단함으로써 마침내 임무를 완수한다. 안 의사는 품속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코레아 우라!(Korea hura! 대한제국 만세!)”를 목청껏 삼창한 후 현장에서 체포된다. 청나라 땅 러시아 조차지였음으로 그들이 선택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일제에 신병을 넘기고 만다.

여기서부터 꼬인 일정은 일제가 선임한 국선변호인만의 조력을 받을 수 있고, 포로 대한의군이 아닌 일반인 테러리스트로 간주하며, 심지어 러일전쟁의 앙금이 초래한 러시아 저격병의 소행으로까지 몰고 갔다. 게다가 8일 만에 여섯 차례나 재판을 속행하여 사형을 선고하고는 유해마저 반환을 거부했다. 거사가 몰고 올 파장을 두려워했기에 여순감옥 부근 어딘가에 임의 매장 한 채 오늘날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섬나라의 야만과 졸부 근성을 읽을 수 있는 치졸한 꼼수다. 이렇게 일제도 두려워했던 안 의사는 거사와 관련하여 수많은 일화로 우릴 깨우친다.

저격 후 현장에서 도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코리아 우라'를 외친 의연함은 물론이고 재판장에게도 이토의 15개 죄상을 폭로하며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말라. 이토를 죽은 것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다. 나는 독립군의 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살해했다. 나는 군인이다. 의병 참모중장인 내가 왜 일본 판사의 심문을 받는가?”라며 심하게 항의했다. 이런 안중근의 어머니는 더욱 강한 호랑이였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카톨릭 신자였던 조마리아 여사의 마지막 당부였다. 매우 당찬 대한의 어머니를 보게 된다.

사형집행 당일인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그간 자신을 감시하고 호송한 일본 헌병에게 휘호를 선물한다. 매일 안 의사의 당당하고 의연함을 본 그는 의사를 너무 존경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간수라는 자신의 임무를 몹시 괴로워했다. 그간의 노고와 심적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그리고 ‘국가 안위를 위해 노력하고 애쓰라(國家安等心焦思)’는 명구도 남겼다. 아마도 후세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당부였던 것 같다.

“5분만 시간을 주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소이다.” 교수형 직전에 일제가 묻는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안중근의 부탁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순교하였으니 거사 6개월 만의 일로 그의 나이 30이었다. 이처럼 의사의 장대한 쾌거에 국내보다는 나라밖 중국이 더 흥분했다.

청말 과도기의 실세 원세계는 “살아선 백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년을 가리라!"라고 했으며, 혁명가 손문은 “공로가 온 나라를 덮었다",장개석 총통은 “살아서는 짧은 일생이었지만 죽어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청말의 사상가 양계초는 “의로운 거사에 온 세계 젊은이들이 놀랐다.”라는 등의 찬양과 애도로써 추모했다. 일제에 맞서 씨우던 그들의 심사를 대변한 것으로, 안 의사를 통한 대리만족이었다.

심지어 “혁명가가 되려면 손문처럼 되고, 대장부가 되려면 안중근처럼 되라.”는 중국 속담도 생겼다. 이러한 애도와 찬양에도 불구하고 을사오적 이완용은 만주까지 찾아가서 이토의 가족을 위로하는가 하면, 순종에게 위로금을 강요하여 헌납하게 한다. 정말 간신질에 충실한 역적을 보게 된다.

2월 14일은 안 의사의 사형선고일임에도 요즘 발렌타인데이의 상술이 더 크게 부각 되고 있어 슬프고 안타깝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과감히 몸을 날려 본분을 다한 후 낯선 들판에 버려져 이름없는 들꽃으로 산화한 그분, 때문에 '안중근의거일'로 정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그 날의 고운님이시다.

“조국 광복과 동양 평화를 위해 태어난 ‘이 땅의 예수’였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는 문영숙 작가의 고백이 그들에게 크게, 그리고 계속 들렸으면 한다.

양태규 옛글21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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