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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까지 퍼지는, 人香萬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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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까지 퍼지는, 人香萬里
  • 전민일보
  • 승인 2021.12.09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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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자청한 6명 중 제일 먼저 일어선 자는 그곳의 최고 부자 외스타슈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주인공답게 의연하다. 그러나 손은 반쯤 풀려 있다.

다음은 법률가인 장 데르다. 적에게 넘겨줄 성문열쇠를 쥐고 있지만 얼굴은 더 없이 강직하고 단호하다.

다음은 거상 피에르 드 위쌍과 그의 아들 자크 드위쌍이 나섰다. 얼떨결에 자원한 아들이 울상인 채 입은 반쯤 벌려 있고 손바닥은 힘없이 펼쳐져 있다. 이에 걱정이 된 아비는 “뒤돌아보지 마? 마음 약해져.”라며 귀엣말을 한다. 그 다음은 학자 장 드 피앵스였다. 그의 얼굴에는 삶과 죽음은 어차피 부질없음이라는 실존적 허무가 서려 있다. 마지막엔 두려워 울고 있는 시민 앙드리외 당드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패닉에 빠진 채 머리를 감싼 필부의 모습 그대로다.

이것은 근대 최고의 조각가 로댕이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칼레의 시민’이라는 작품의 모습이다.

1347년 프랑스를 침략하기 위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가장 가깝고 쉬운 칼레市부터 공격했다. 적어도 한 달이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예상외의 저항으로 무려 11개월을 지체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왕은 격노했고 시민 전체를 몰살하겠다고 경고했다. 신하들의 설득 끝에 최종적으로 6명을 처형하겠음을 통보했다. 이에 죽음을 자원한 6명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용기 있는 영웅들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라며 반품론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처럼 죽음이 너무나 두렵지만,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원했기에 위대한 것이다.” 로댕(1840~1917) 이 행한 설득이다. 죽음을 두려워한 지극히 평범하고 초라한 일상의 인간 모습들이지만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그래서 12만 시민 전체를 구한 감동 스토리는 7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세계를 울리고 있다. 그들이 남긴 숭고한 정신 때문이다.

만 리까지 퍼진 훌륭한 사람들의 향기(人香萬里)라고들 하지만 실은 만대까지 계속 회자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 향기를 맡고 그에 취해 후대에 전할 또 다른 그윽한 향기들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처럼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헌신과 사랑이 진정한 향기의 근원이 됨을 본다. 이는 “인간 최고의 도덕은 애국심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이 실감나는 현장이 된다. 평시보다는 위기에, 나보다는 남을, 강한 자가 약자를,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높은자가 낮은 자를 위해 희생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 상류층의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귀족이 먼저 참여하는 솔선수범으로, 미국에서는 여기에 부자들의 자선과 기부까지 추가하여 정착되었다. 양 차 세계대전 때 영국 상류층 자제들이 다닌 이튼칼리지 출신 전사자들이 특히 많았고, 포클랜드 전쟁 시 앤드루 왕자가 조종사로 참전했던 것이나, 625 전쟁 때 미국 장성의 자제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던 것이 그 증거다.

또 벤자민 구겐하임은 스위스 출신으로 미국 철강재벌이었다. 그는 ‘여자와 아이 우선' 이라는 구명보트 승선의 원칙을 지켰고 자신에게 순서가 돌아오지 않자 구명조끼까지 양보한다. 그리고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 아내에게 “내가 나의 의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유언한다. 그때 그 배의 1등실에는 미국과 유럽의 거부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돈과 권력 순이 아닌 약자 우선의 탈출원칙을 지켰고, 그때문에 자신들은 ‘바보처럼' 죽어갔다. 영화 '타이타닉' 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물론 우리에게도 의병이나 독립군 그리고 한국동란 때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필부들도 많았다. 심지어 노비도 있었다. 마침내 죽을 이유를 찾았기에(得死所) 이들은 군번도 없이 깊은 골짜기 이름 없는 전선에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후손인 우리는 그분들을 민족의 수호신으로 추앙하며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최고의 향기를 선사한 이들의 정신은 향기 중에 사람의 향기가 가장 진하고 아름답다는 진리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향기를 가진 사람이길 원하지만 뜻한 대로 되진 않는다. 평소 배우고 깨달은 바를 좌우명 삼아 덕행일치의 태도가 습관 되어 천성을 이뤄야 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몸을 날려 남을 도울 살신성인의 자세 또한 중요한 덕목이 된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해 仁을 해치지 않고 자기 몸을 희생하여 仁을 이루는 경우는 있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또 내가 원하는 것이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사는 것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겠다.” 仁과 義를 위해서는 구차하게 生을 탐하지 않는 공맹정신을 말한다. “義를 바탕 삼고 禮로 그를 행하며 겸손으로 그를 드러내고 믿음으로써 그를 이루니 참으로 군자답구나!” 살신성인한 군자의 바탕을 흐르고 있는 인향만리의 정신이다. 향기로운 꽃 내음 백리까지 간다고 하지만 사람의 향취만 하 본성에 바탕한 떳떳한 밝은 마음(秉韓之良心), 멀리까지 퍼지고 그로 인해 멀리서도 찾아오게 한다. 닮고 싶기 때문이다.

예쁜 사람은 많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적은 요즘, 당신은 어떤 향기를 가졌나?

양태규 옛글 21 대표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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