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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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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백리
  • 전민일보
  • 승인 2021.11.1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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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백리하면 대부분 황희정승을 꼽는다. 69세에 영의정에 올라 무려 18년 동안 세종을 보필했으니 명재상과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꼽힐 만하다.

그와 더불어 비가 줄줄 새는 집안에서 우산을 펼쳐들고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라고 하자 부인은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고 했다는 류관의 이야기는 이 땅의 벼슬아치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정종실록에는 황희의 평가가 부정적이다. 한 인물을 두고도 평가를 달리한 기록이 보이는데도 전설과도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조선 초기에는 민심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신적 덕목이 필요했다. 충과 효도 중요했지만 생활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이 필요하여 청백리제도를 두었다. 그것도 황희와 맹사성, 유관과 같은 정승반열에서 선정하여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교훈을 제시했다.

청백리는 청렴과 결백의 합성어다. 청렴은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 결백은 ‘행동이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조촐하여 아무런 허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청백리는 탐욕과 허물이 없어야 한다.

그 전제조건이 가난이다 보니 집이 누추하고 비가 줄줄 새야 하며 창고는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당사자가 죽으면 장례비조차 없어 조정에서 장례 물품을 보내주는 틀에 박힌 이야기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황이나 유성룡과 같이 노비와 재산이 많은 관리도 청백리로 녹선 되었다. 청빈보다는 인품과 업적에 치중한 것이다.

청백리는 죽은 관리에게사용하는 명칭이다. 초창기에는 살아있는사람을 청백리라 했으나 명종 이후에 염근리(廉謹吏)로 바뀌었다.

살아있을 때 청백리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 했다.

세종조의 삼청 황희, 맹사성, 류관을 관리의 귀감으로 삼은 것은 그런 시대적 요구에 의해서였다. 그 전통은 순조까지 이어져 총 218명의 청백리가 녹선 되었다. 각 시대마다 모범관리를 표창하여 관기숙정(官紀肅正)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廉者牧之本務
(청렴은 목민관의 기본 임무다)

萬善之源諸德之根
(모든 선의 근원이자 덕의 근본이다)

不廉而能牧者未之有也
(청렴하지 않으면 목민관을 할 수 없다)

목민심서 ‘청심’편의 청렴에 관한 글이다. 요즈음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것은 청렴하지 못한 몇몇 정치인의 행위 때문이다.

한 사람의 그릇된 정치 행위는 국민의 불신을 자아낸다. 청문회에 올랐다가 엉뚱한 사생활만 드러내고 낙마하는 경우를 보며 청백리가 주는 교훈을 되새겨 본다.

이 시대의 청백리는 얼마나 될까?

청백리가 얼마나 많아야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이루어질까. 역설적이게도 청백리는 없어야 한다.

공직 사회가 얼마나 썩었으면 청백리와 염근리를 선정하여 표창했을 것인가. 모든 공직자가 청백리면 청백리제도는 필요 없는 것이다.

이제는 부패관리를 처벌하여 공직기강을 세우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가 되었다. 현장 확인도 없는 탁상행정의 안일함과 복지부동의 무사안일을 척결하는 과감한 행정개혁이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는 길이다.

강기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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