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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사회(錄取社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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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사회(錄取社會)
  • 전민일보
  • 승인 2021.10.0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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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 있는 시·공간에서 벌어진 말과 행동을 제 삼자가 검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로 거짓이 참보다 훨씬 믿음을 주는 경우도 적잖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인 내게도 기억에 남는 일이 몇 번 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유일한 상대방이 제 삼자 앞에서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순간 느꼈던 무력감은 생각보다 강했다.

나보다는 그가 훨씬 설득력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때로 너무도 차분히 자신의 허구를 구체화시켜 타인을 납득시킨다. 그 앞에선 종종 진실이 패배한다.

거짓과 진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라쇼몽(羅生門) 앞에서 전언(傳言)을 듣고 있는 처지이다. 그런데 그 혼돈을 정리해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등장했다. 그로인해 거짓이 진실을 위협하리라는 염려는 상대적으로 덜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녹취(錄取)라는 진실담보의 강력한 수단이 생긴 것이다.

대법원장의 거짓말이 탄로 난 것도 녹취록이 있어서 가능했다. 사법부의 수장이 거짓을 말하는데 그 누구 말을 진실이라 확신할 수 있겠는가? 녹취록은 이제 신(神)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전화로 문의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는 친절한 안내 멘트가 나온다.

녹취를 하고 있음을 밝히는 정중한(?) 경고다. 그것은 효과를 발휘해 악한(?) 인성을 가진 사람을 타율적으로나마 제어하는데 일정부분 성공했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각종 cctv는 범죄 해결의 강력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 뿐인가 극히 개인적 시·공간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대법원장이 후배 법관과 나눈 대화와 관련 거짓을 말했던 것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제 녹취는 대법원장 같은 사람의 삶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낯선 타인은 물론 지인과 혹시라도 전화로 언성을 높이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녹취다.

술자리에서 나눈 편한 대화도 시시각각 검증해야 한다. 만일 부적절한 어떤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녹취자료로 공개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한사람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까지도.

범칙금이 교통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듯이 녹취록이 개인의 삶을 건강하게 강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녹취록이 신(神)의 영역 너머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물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는 것이 신의 명령이었지만 그것을 지킬 것인지 여부는 인간의 선택으로 남겨둔 것이다.

녹취록은 그런 점에서 신을 능가한다.

1987년 그 해는 격동의 시간이었다. 6·10 항쟁과 6·29로 대표되는 그 해의 대학 캠퍼스는 시위와 대자보로 얼룩져 있었다. 그 때 인상적인 대자보가 하나 기억에 남는다.

한 교수가 강의도중 했다는 말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극단적 폭력시위 진압에는 총기를 사용한다.”

나는 그 교수의 발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는 그가 거짓을 말해서가 아니다.

그는 사실을 말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 말을 한 시점과 상황에 대한 철학의 문제다.

대학은 자유로워야 한다. 나는 그 교수가 강의 중 했던 그 말이 학생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학교 내에서의 문제로 끝나야 한다.

서슬 퍼런 군사정부 하에서도 교수가 강의 때문에 문제가 되어 끌려간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물론 내가 알지 못 하는 비극이 숨어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없다.

성매매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수업에서 누군가 성매매를 옹호하는 얘길 했다고 그것을 녹취해 대중에게 공개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에 부합하는 일인가?

이제 교수도 강의를 할 때는 녹취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와 위안부를 미화하는 강의를 하는 사람을 응징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그의 질문과 내 답은 순환논법의 모순에 갇혔다. 지인과 통화 후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거 녹음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녹취사회는 나를 사이비 도덕군자로 만드는데 분명 일정부분 공헌하고 있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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