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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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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폭력
  • 전민일보
  • 승인 2021.08.27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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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분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체스를 이용하여 설명했는데, 랑그가 체스의 규칙이라면 빠롤은 체스를 두는 행위에 해당한다. 즉 체스를 두는 능력이 랑그라면 그 능력을 활용하는 행위, 상대를 이기기 위해 수를 쓰는 실제적 활동이 빠롤이다.

사람마다 언어를 사용할 때는 현장의 상황이나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예의나 방법은 달라진다. 마치 체스를 두는 수순이 다른 것과 같다.

밤하늘의 별이 누구에게는 고향 생각을 달래주는 노래의 대상이 되고 누구에게는 슬픔을 토로하는 하소연의 대상이 되는 것도 어떤 감정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발화자의 말도 청자마다 자기의 입장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달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런 현상이 곧 빠롤이다.

결국 랑그는 정형화된 문법적 체계로서 사회적인 의미를 지니고, 빠롤은 실제적 언어활동으로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언어는 표현의 뉘앙스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때로는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소쉬르의 이론을 과하게 적용한 때문일까. 우리 사회의 언어는 사회적 기능보다 집단적 기능과 개인적 감정이 더 크게 작용한다. 심마니나 광부, 어부, 군인들이 쓰는 집단적 언어는 그 특성에 따라 이루어진 특수 계층의 언어로 인정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끼리끼리 문화가 득세하여 그들만의 세상을 형용하는 은어와 비어, 약어(略語)로 뒤틀려 있다. 그래도 약어는 신세대의 기발한 재치가 있어 설명만 들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으나 공적 인물들이 상대방을 비하하고 조소하는 음해적 언어는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도가 지나쳐 폐해가 심하다. 어쩌면 그렇게 고상한 말만 골라 인신공격을 해대는지 그저 걱정스러울 뿐이다.

전통사회의 우리 언어는 상대방을 욕해도 김삿갓의 시처럼 파자(破字)와 해학이 깃든 언어의 유희가 많았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언어는 서로 맞받아치는 여유로 웃음을 자아내는 오락의 일부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품위를 지켜온 언어의 전통이 불과 몇십 년 만에 저속하고 천박한 문화를 이루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경제 수준에 맞게 발전한 영상문화가 빚어낸 음지의 일종이다.

잘못된 우정과 의리를 강조하기 위해 거침없이 쏟아내는 욕설과 실제 상황처럼 묘사한 영화들이 청소년들의 순수한 랑그적 언어를 감정에 치중한 빠롤의 폭력적 언어로 부정적인 언중(言衆)을 형성하게 했다. 표현의 자유에 편승한 나머지 언어에 감정의 과부하 가 걸린 것이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말이다. 이 명제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는 곧 자신이 세계를 아는 안목에 비례한다는 뜻이다.

시쳇말의 언어는 ‘가방끈’과 비례한다는 고백이어서 인간적이다. 더구나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밝힌 그의 견해는 교양 있게 사는 인격자의 자세를 밝힌 명언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하라.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우리에게 주는 말 같아 가슴에 와닿는다.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감정대로 떠벌리는 요즈음의 세태에 딱 어울리는 충고다. 오염된 언어를 사용하면 인격이 오염되어 있고, 천박한 말을 하면 인격 또한 천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침묵이 금이고 웅변은 은이라 했다. 침묵이 웅변보다 나은 경우는 허다하다.

쓸데없는 말을 내뱉거나 본의 아니게 실수한 말로 화를 입은 사람들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이 바로 침묵의 가치를 교훈한다.

이를 예견이라도 하듯 영국의 평론가이자 역사학자인 토머스칼라일(1795~1881)이 침묵에 대하여 금과옥조같은 격언을 남겼다.

“침묵은 말보다 웅변적이다. (Silence is more eloquent than words.)”

지금은 침묵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모두가 개성이 있고 똑똑하여 마음껏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회라서 오히려 웅변이 더 효과적이다. 연산군이 풍도(882~954)의 설시(舌詩)를 새긴 신언패(愼言牌)를 환관과 신하의 목에 걸어 언론을 통제하던 강압의 시기에도 김처선은 죽음으로 충언을 했다. 언어는 절대 왕권시대에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다.

언어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욕설은 형편없는 우리 사회의 품격이다. 바삐 돌아가는 속도에 적응하다 보니 생각도 빨라지고 언어도 빨라진 탓일까. 전후사정 고려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고상한 입을 더럽힌다.

욕설이 아니면 실감이 없다는 영화계의 반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해도 한 때 아이들과 함께 영화 보기가 힘들 정도로 대화가 저속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들을 나무라며 바로잡겠다고 나섰으니 강아지가 웃을 일이다.

누가 그들을 정죄할 수 있을 것인가. 상업주의에 물든 어른들이 먼저 변하고 반성하여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새삼 TV화면의 공개적으로 펼쳐지는 폭력과 폭언 장면이 떠오른다. 토론을 보면 아이들의 말싸움보다 더한 장면을 연출한다. 사회를 선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삿대질하며 드잡이하는 현실은 언어를 더럽히는 또 다른 원인이다.

욕설불감증은 폭력불감증으로 확대되는 징검다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기옥 시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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