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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의 요람 노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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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의 요람 노적봉
  • 전민일보
  • 승인 2021.07.01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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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 아닌 글을 쓰게 하소서.”

“모국어가 살아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생전에 최명희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다. 최명희는 평소 국어사전을 시집처럼 읽었다. 그래서 소설 「혼불」이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운율을 살려 모국어의 감미로움과 미려함과 풍성함을 노래한 대서사시로 평가받게 되었나 보다. 일본 동경대에 유학했던 아버지 최성무와 유학자 허완을 외할아버지로 둔 집안 배경부터가 문학소녀로서의 꿈과 자질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 노봉마을을 자주 드나들며 소재를 발굴하고, 온 힘을 기울여 쓴 대하소설 『혼불』에서 최명희의 지고지순한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일제강점기 때 매안 이씨 가문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과 관혼상제 등을 아름다운 가락으로 그려낸 걸작이다. 하지만 향년 51세로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1998년 혼불처럼 홀연히 떠나버려 애잔하다.

한민족의 삶과 우리말에 깃든 얼의 무늬를 혼불로 그려낸 그의 문학 혼은 전주 경원동과 교동주변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한옥마을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에서 경기전 뒷담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중간에 그의 생가터, 최명희 길, 최명희 문학관이 있기 때문이다. 전주의 진산으로 일컫는 건지산에 자리한 최명희 묘소와 혼불문학 공원에서도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노적봉 정기를 받아 1400년 전 삭령 최씨가 집성촌을 이뤘던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에도 그의 발자국이 뚜렷하다. 혼불문학관은 최명희 아버지의 고향이자 민족적 대하소설의 배경지였던 연유다.

혼불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과 애련함, 근엄함과 서러움, 밝음과 어둠 등이 오롯이 살아있다. 최명희 소설가의 집필실을 재현해 놓은 유물전시관에는 생전에 사용했던 만년필, 커피잔, 원고지 등 유품과 의복, 소품 등에서도 문향이 그윽하게 묻어난다. 당시의 사회적 기풍과 세시풍속, 관혼상제 등 주제별로 우리 전통문화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도 시시각각 다가온다.

앞마당에 있는 한옥형식의 너른 정원과 물안개를 일으키는 물레방아가 옛 정취를 자아낸다. 혼불에 등장하는 서도역은 전라선이 옮겨 간 뒤 기차가 정차하지 않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혼불문학관 앞마당에서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미려한 산등성이가 손짓한다. 가을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금강산의 가을 별칭을 얻었다는 풍악산 능선과 일명 서산으로 불리는 노적봉이다. 암벽이 병풍을 두른 닭벼슬 모습의 계관봉과 군자다움과 풍요로움의 상징인 노적봉의 정기를 받은 길지에 노봉마을 터를 잡았다. 선현들의 지혜가 번득거린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남원으로 행차하면서 춘향로 박석고개에서 노적봉을 바라보다가 군자가 기거할 길지라고 무릎을 칠 정도였다. 최명희도 서북으로 비껴 기맥이 흐를 염려가 있는 노봉마을 서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노적봉과 계관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못을 파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세운다면 가히 백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누릴 만한 곳이다. '고 했다.

노적봉을 길지로 칭송했던 선현들의 예견은 적중한 셈이다.

혼불문학관 서쪽으로 난 호젓한 산길을 오르면 조릿대가 울창한 호성암 터에 닿는다. 고려 초 도선국사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 온다. 사포 대사가 고통으로 울부짖는 호랑이의 입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자 호랑이가 그 보답으로 터를 잡아줬다는 설도 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그 절에는 물맛 좋은 석간수가 목마른 중생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거대한 암벽에 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상은 연꽃을 두 손으로 받들고 명상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울창한 소나무가 용트림하는 암릉을 걸으며 산림욕을 즐기노라면 신선이 된 기분이다. 닭 볏모양의 계관봉을 지나 송림과 바위가 어우러진 스릴 넘치는 능선이 이어진다. 두 시간이면 혼불의 산실 노봉마을을 품은 노적봉에 닿는다.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훌륭하다. 노봉마을과 용궐산, 회문산, 무량산, 원통산, 교룡산, 만행산 천황봉이 한눈에 훑어진다.

한국 현대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혼불의 산실이자 배경지인 노봉마을과 노적봉에서 온종일 문향에 취했다.

김정길 영호남수필문학협회 전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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