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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보다는 충"...선열들의 독립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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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보다는 충"...선열들의 독립정신
  • 이건주 기자
  • 승인 2021.01.20 0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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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의병장과 창의일기

1876년 병자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한 불평등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의 민초들은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자존을 위한 항일투쟁을 펼치면서도 친일파와 친일단체들의 저항까지 받아야하는 2중3중의 사회적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1894년 일본 자객들에 의해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되고 불태워지는 을미사변과 을사늑약,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의 국가 혼란기에 봉착하자 조선의 민초들은 분연히 일어나 항일투쟁에 나섰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 또한 1907년 8월 26일 집을 떠나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된다. 정재는 진안 마이산 아래 용암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 의병장을 맡고 의병대의 이름을 ‘호남창의소’라 칭했다.

이 때 정재의 의진에 합류한 의병만 300여 명이었으며, 호응한 군사는 1천여 명에 달했다. 이석용 의병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대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투사들이 선봉에 섰다.

그들은 박만화, 최덕일, 송판구, 여운서, 김성학, 김사범, 윤명선, 전해산, 한사국, 이광삼, 박갑쇠, 곽자의, 임종문, 홍윤무, 박성무, 윤병준, 김사원, 김공실, 김성율, 한규정, 박금동, 박문국, 오기열, 조영국, 김학문 등 28명으로 일본군·친일파와 싸우다 장렬히 한 줌의 피를 이땅에 뿌렸다. 이들 28의사의 위패는 1957년 재임했던 양창현 임실군수에 의해 조성된 소충사에 봉안돼 있다.
정재는 자신의 의병군대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해 남겼는데, 의진 이름 ‘호남창의소’를 딴 ‘호남창의록’이다. 창의록은 후에 기적적으로 발견되면서 ‘창의일기’로 세상에 나왔다.

창의일기는 항일투쟁을 위해 집을 떠났던 1907년 8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약2년 간의 기록이다.

매일매일을 산 속에서 혹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민가에 숨어들면서도 2년여 간의 촘촘한 기록을 남겨 상상할 수조차 없는 당시의 실상이 일부라도 남아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1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약간의 기록이라도 남아있다는 것도 기적적인 일이다.

창의일기가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게 된 데에는 동지였던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정진희(족보명:정종엽)선생의 숨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한 상황이다. 당시의 민초들은 독립운동 옆에도 안 갔어도 친일파와 그 일당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것은 수없는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항일투쟁을 했던 투사의 다락에서 기록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기록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을지는 추정만 가능하다. 그 귀한 기록이 보존돼 아들 이원영 의사에게 전해지면서 정재의 행적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기록에 의하면 1907년 8월 “부모에 대한 효보다는 나라에 대한 충이 앞서야 한다”며 부모와 처자식을 뒤로 항일투쟁의 길에 나섰던 이 투사는 7여 년의 투쟁 끝에 밀고로 붙잡혀 1914년 전주와 대구형무소에 수감, 사형을 언도받고 있었다. 

정재의 성품과 기개는 창의일기와 동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정재는 “내가 평생동안 한 일 가운데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보아 그의 기개와 성품이 어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의진에서 선봉 등을 맡아 항일투쟁을 벌였던 28의사의 위패가 봉안된 소충사는 임실군 성수면 양지리에 위치해 있으며 지난 2002년 ‘조의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석용 의병장은?

이석용(李錫庸,1878~1914) 의병장은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출신으로 호는 정재, 고려시대 정당문학을 지낸 황강 이문정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봉선이다.

초년에는 겸재 김관술에게 수학했고, 후에는 연재 송병선에게서 배웠다. 이 의병장은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한 학자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까지 터지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임을 알고 충과 효 사이에서 고민하다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거병을 위해 길을 떠났다.

이 투사는 서당에서 학문을 가르치던 사람이라 의병을 모으면서 ’격중가‘를 지어 휘하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비나 눈이 와 일전을 치르지 못하는 날에는 시를 읊었다.

정재는 휘하의 의병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적의 10가지 죄를 알렸는데, 첫째로는 갑오농민혁명기에 조선인을 무참히 살육한 죄, 둘째로는 이등박문이 일황을 시해하고 이웃나라를 무력으로 위협한 죄, 셋째는 낭인들을 동원해 명성 황후를 시해한 죄, 넷째는 열국과 조선을 이간시킨 죄, 다섯째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여섯째는 일본이 우리강토를 무력으로 점거한 죄, 일곱째는 일본이 우리의 풍속을 파괴한 죄, 여덟째는 우리의 재산을 강탈한 죄, 아홉째는 우리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열 번째는 제국열강을 회유해 국제법을 어긴 죄라며, 구국의 길은 거병해 일본에 대해 무력투쟁을 하는 것이 곧 대의라고 설파했다.

이 투사는 의병들을 지휘함에 있어 ’의진 약속 14개조‘와 ’의령 10조‘ 등을 마련해 군율을 엄격히 했다. 특히 조선인이면서 친일 행각을 하던 ’일진회‘를 처단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 투사의 의진은 거병 후 초기 단계에서는 진안읍 ’한방분파소‘와 ’우편취급소‘ 등을 폭파하는 일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이석용 투사를 비롯한 300명의 휘하 의병들은 진안과 임실, 남원, 정읍, 곡성, 함양, 구례, 순창 등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등지에서 1909년 9월 왜적의 ’남한대토벌작전‘ 으로 옮겨다닐 수 없을 때까지 2년여 간 동안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철통같은 헌병 경찰제도가 시행되자 더이상 무장 항쟁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은밀히 일본에 밀사를 보내 일본 천황을 주살하려 계획했다. 또 1912년에는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해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주요 건물을 방화할 계획을 세우고 활동자금을 마련하다가 동지의 밀고로 1913년 10월 고향 임실에서 경찰에 체포돼 전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14년 4월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사형이 확정된 후 이 투사는 당시 15세가 된 아들 이원영 의사와의 최후 면담에서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볼 것이니 일본땅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며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고 유언을 남겼다.

아들인 이원영 의사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 곧바로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처음에는 남원읍 교량산에 안치했다가 28년이 지난 1942년 9월에서야 일본땅을 볼 수 있는 전남 영암군 월출산 아래 봉안했다. 정재의 평생 소원에 의해 이땅을 유린했던 일제는 원자폭탄에 의해 손을 들었다. 

해방 후에는 월출산 부근 도시개발계획에 의해 1957년 휘하 의병 28인과 함께 임실 소충사에 안장됐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바로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혀 바로 알게 해야 할 것이다’ 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를 되짚어보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아들 이원영 의사는?

황극단이 그늘진 곳으로 밀려난 배경에는 ‘일본 경찰국장 때문이었다’고 증손자 이 씨는 전해들었던 기억을 되짚어 말했다.

“해방 후 그 언제쯤 김구 선생이 덕진공원에 이석용 증조 할아버지의 추모비를 세웠는데 당시 일본 형사가 경찰국장으로 부임해 비를 밀어버렸다고 했다”며 “광복 이후에도 친일세력이 득세해 추모비조차 편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그렇게 훼손당한 추모비 일부를 수습한 것은 이석용 투사의 아들인 이원영 의사였다.

증손 이 씨에게는 할아버지이다. 이 의사는 황극단에 기록된 것처럼 요강행상 등으로 모은 재산을 털어 덕진공원 안에 기적비를 세웠으나, 경찰 국장에 의해 훼손돼 유지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훼손된 비를 수습해 다시 조성한 곳이 그늘지고 인적없는 전북대 어린이회관 맞은편 자리였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연도는 기록에 없지만 전언에 의하면 여러 번 재정비 된 듯하다.

중요한 것은 황극단이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듯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됐다. 황극단이 있었던 부근에 현재 보훈공원이 조성 중이기 때문이다.

이 투사의 아들 이원영 의사는 9세 때부터 부친인 이석용 의병장의 밀서를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등 어린 나이에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또 부친의 추모비를 세우려다 끌려가 옥고를 치루기를 수차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부친의 행적을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마을금고 전 이사장을 지냈고, 지금은 현대장례식장의 공동대표인 이석용 의병장의 증손자 이정하 씨는 “나라가 바로 세워져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친일세력이 득세해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며 한숨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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