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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꼰대가 본 2차 가해와 후배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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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꼰대가 본 2차 가해와 후배권력
  • 전민일보
  • 승인 2020.08.04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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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나도 꼰대가 되었다. 원로나 선배가 아닌 젊은이와 후배가 더 두려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때로 퇴계가 율곡을 보면서 느꼈던 소회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보신을 위한 비겁함이기도 하다.

최근 강진구 경향신문 노동탐사전문기자가 처한 상황을 보면서 가지는 느낌도 그렇다. 내가 아는 강진구 기자는 여전히 불편한(?) 사람이다. 특히 힘 있는 강자와 우상에게 그렇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진영논리와는 무관한 기자라는 점이다.

강진구 기자는 박근혜 정부 당시 집권층으로부터 수많은 고소고발을 당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김상조 정책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에 지명되었을 때 검증을 위한 합리적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레기’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 양진영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미운오리새끼가 된 것이다. 그런 그가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번엔 박재동 관련 미투에 관한 의혹 제기가 문제가 되었다. 그의 기사가 삭제된 논리는 ‘피해자 중심 보도준칙 훼손’, ‘2차 가해’, ‘성인지감수성 결여’ 등이다.

그런데 삭제의 주체가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경향신문 후배기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 하나하나는 누구도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 침묵한 것이다.

꼰대의 우문이다. 과연 피해자와 가해자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누구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배제할 수 있는 자연법적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미투를 주장하면 그 즉시 피해자이고 상대방은 가해자라면 우리는 더 이상 문명사회에 산다할 수 없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할 방어권이나 합리적 의문조차 ‘2차 가해’로 얘기한다면 진실규명은 존재이유가 없다.

여성은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딸이고 누나이며 동생이다. 그와 꼭 같은 크기로 남성도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들이고 오빠이자 동생이다.

선조 11년인 1578년 2월, 이런 일이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가 전 무안 현감 전응정의 관곡 횡령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런데 사건 처리과정이 흥미롭다. 당시 조정을 이끌어 간 세력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을 장악한 젊은 동인 당하관들이었다. 이들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던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선배사림 중 상당수는 그들을 두려워하여서, 구차하게 몸을 사리며, 도리어 후배들에게 아부를 하곤 하였다.”

문제는 전응정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동인과 관련된 인물들이 연관된 것이었다. 그러자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국왕인 선조도 이 젊은 동인세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선조는 뇌물 받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면죄부를 주었는데 이때 대간은 침묵했다. 국왕까지도 동참하게 만든 전형적인 진영논리의 승리(?)이자 후배권력의 전횡이었다. 인간은 당위와 존재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다.

평화애호민족인 한국인과 제국주의를 경험한 일본인이 칸트의 <영구평화론>를 대하는 자세를 설명하는데도 그것은 유효한 틀이다.

2004년 기준 35쇄가 넘게 인쇄된 일본판과 단 1쇄로 끝난 한국판은 평화주의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공적인 책임을 아무나 질 수 없듯이 평화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평화를 깨트릴 힘이 있는 당사자가 대상이라는 것이다. 능력이 안 되는 내가 서울 강남에 살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그것은 러일전쟁 당시 대한제국이 선언한 중립의 외침과 같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여전히 당위 속에 살고 있다. 청렴, 애국, 평화 등 모든 도덕률이 그 안에 자리한다.

당위는 우리의 지향점이다. 모두 애국을 말하는 것은 당위이지만 일제 강점기 순사시험에 그토록 많은 조선인들이 응시하고 합격자가 나온 마을에서 잔치를 벌인 사실은 존재이다.

1578년 2월 꼰대들을 침묵시킨 그 젊은 대간들은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오래 전 그들과 무엇이 닮고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고민은 오늘 우리 몫이다.

사족, 칸트는 난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대단히 현실적인 방안을. 꼰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강진구 기자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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