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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 70주년.. 학도병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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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 70주년.. 학도병의 이야기
  • 장세진 기자
  • 승인 2020.06.24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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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박건종씨

“내 나이 열여덟, 방학인데 학교에 나오래서 갔어. 그대로 대구로 갔지”

6.25 전쟁의 기억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박건종(88) 옹을 아프게 했다. 

군번도 이름도 없이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뛰어든 박 용사는 군산사범학교 6학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때가 1950년 7월이었어. 방학인데 학교에 나오래서 갔더니 교관이 ‘전쟁으로 나라가 위태로운데 이대로 집에 갈래, 아니면 인민군 쫓아내러 같이 갈래’ 묻더라고. 당시 모인 학생들 중에 집에 간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그대로 모두 열차에 탔어”

그렇게 그는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교복을 입은 채 남쪽 대구로 향했다.
대구에 도착한 뒤 학도병들은 고작 30분의 군사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다.

“우리는 철모도, 군번도 없는 교복 군인이었어. 내 키보다 큰 M1소총을 들고 앞도 안 보고 총을 쐈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적이 있다는 방향으로 마냥 방아쇠를 당겼어. 같은 민족의 가슴에 대고 총을 쐈다니 슬픈 일이지”

전쟁 중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는 동료들도 많았다.

“전투 도중 동급생 ‘김의도’가 총탄을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어. 다른 친구 ‘성세경’이 ‘의도야!’라고 외치며 달려 나갔는데 ‘탕’ 소리가 나더니 그 친구도 거꾸러졌어. 그렇게 눈앞에서 친구 둘을 잃었지. 하지만 우리는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은 ‘전사’로 인정받지도 못했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은 서쪽, 국군은 동쪽 전선을 타고 북을 향해 올라갔다.

함경북도 청진에까지 다다른 박 용사는 전쟁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벅찼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중공군이 밀려들면서 그는 양륙함을 타고 포항까지 후퇴해야 했다.

“당시 유엔군이 압록강 물을 떠 왔다고 했으니 며칠 이내로 북쪽 끝에 이를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중공군이 들이닥쳐서 다시 후퇴했어”

이후 전투 중 파편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박 용사는 귀향한 이후 1952년 제2국민병으로 활동하다 이듬해 자원입대해 ‘9590400’의 군번을 부여받고 1964년 육군 중위로 제대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나라를 위해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시절은 군번도, 사진도 없어 그는 참전용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전투 중 사방으로 튄 파편에 팔꿈치와 허벅지를 다쳤어. 살아있는 게 기적이지. 비록 참전용사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그 흉터를 나만의 훈장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어”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박 용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시는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선 안 돼. 같은 민족끼리 양분된 이데올로기로 싸우고 죽어갔어. 우리 민족은 화해로 나아가야 해”

올해는 6.25 전쟁이 발발한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념의 분단으로 자행된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숙연해진 기자에게 박 용사는 “슬픈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고 무거운 한 마디를 남겼다.
장세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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