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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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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 전민일보
  • 승인 2020.06.16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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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후반, 선배 목장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다. 선배는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하며 소를 돌봤고 경비는 십 여 마리의 개가 수행하고 있었다. 하루는 선배가 그 중 한 마리를 잡겠다고 했다.

나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서 외출을 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희생견으로 지목된 녀석이 날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한 마음에 선배에게 상황을 물었다.

“아, 그 녀석을 잡으려했는데 너무 말라서 잡아봐야 먹을 게 없어서 저 위에 있는 녀석을 대신 잡았다.” 하나의 행운이 그대로 다른 누군가의 불행이 된 순간이었다.

개가 소나 돼지 닭하고 무엇이 다른지 묻는다. 그에 대한 답은 각자의 마음과 논리 속에 있다. 내가 그에 대해 달리 말한들 별로 도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육식을 한다. 그렇기에 내가 먹는 그 동물들의 마지막이 덜 고통스러웠으면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진다. 어쩌면 나 역시 ‘악어의 눈물’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무엇인가를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을.

나는 목장에서 최후를 맞이한 그 운 나쁜 개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모른다. 내가 희망하는 바는 그 녀석의 마지막이 덜 고통스럽고 짧게 끝이 났기를 바랄 뿐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한국인에게 개는 소나 돼지와 다를 바 없는 대상이었다.

브리지트 바르도 (Brigitte Anne Marie Bardot)의 문제제기가 불편했던 이유다. 우리는 그에게 문화상대주의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으며 오만하다는 논거를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었다. 이제 다 정리된 것인가.

어느 순간, 집안의 불편한 가족보다 소중하고 친근한 존재였던 개가 나무에 목이 매달려 있었다. 불행한 것은 사람과 달리 개는 목을 매달아도 잘 죽지 않는다.

그러자 그 개에게 몽둥이질을 해댔다. 누군가는 그 장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개는 때려잡아야 맛있어.” 어떤 이는 그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처절한 울음 속에서 보인 그 웃음은 잔인함의 끝판이었다.

개를 그토록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바람이다. 개가 매달려 죽었던 그 나무 아래서 인민재판이 벌어졌을 때 상황은 앞의 광경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한국과 한국인을 대표하는 말 중 하나가 평화애호민족이다. 외세의 침략에 결국 나라까지 빼앗긴 경험에도 불구하고 해군기지 건설이 평화의 섬을 파괴한다고 결사반대하는 상황도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평화, 평화, 그리고 평화.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를 이루지 못한 것인가. 그 어느 나라도 침략하지 않았음에도. 그런데 이 평화가 대내적으로 오면 성격이 달라진다.

서로에 대한 극단적 미움과 증오의 표출은 대외적 평화 이미지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를 추구하는 민족이 대내적으로는 극단적인 잔인함을 표출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누군가는 물을지 모른다. “당신이 말하는 대내적 잔인함의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분단과 동족상잔의 그 순간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이 결정되었을 때 적잖은 선각자들은 이런 걱정을 했다. “결국 내전이 발생할 것이고 한국인의 잔인함이 그 속에 그대로 녹아날 것이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은 서로에 대한 기본적 존중의 마음이 없었다. 비판도 얼마든지 격을 갖춰할 수 있었지만 남과 북 모두 그렇지 못했다.

히틀러의 고국이자 전범국인 오스트리아가 승전국의 분단시도에도 불구하고 왜 분단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면 남북한이 외세 탓만 할 수 없음을 반증한다.

개를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 의견이 다른 사람과의 공존이 불가능한 사람, 절대 선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무장해 절대 악을 척결하는 의열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다수인 사회는 잔인함의 변경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붕당과 한국의 정당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라던 대학시절 시험문제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본다. 생명의 귀함이 어찌 개뿐이겠는가.

풀 한 포기에서도 생명의 경외감을 가질 수 있다면 잔인함의 근원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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