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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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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켤레
  • 전민일보
  • 승인 2020.04.02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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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상품권으로 백화점에 들러 구두 한 켤레를 샀다. 콧등이 준수하고 몸통이 거울처럼 깨끗한 유명상표가 붙은 구두다.

그는 기나긴 외출이나 중요한 행사장에 갈 때면 나와 한 몸이 되어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와도 내 발과 생사를 같이하던 너는 더러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도, 냄새나는 시골 뒷간에 들어갈 때도, 어떤날은 개자리의 그루터기를 밟고도 불만스런 몸짓 한 번 하지 않고나의 분신으로 살았지. 미끄러운 도로에서 끝날을 세워 나를 보호하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기꺼이 동행해주던 너와의 인연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걸으면서 발이 좀 불편함이 느껴져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두의 발등 쪽 옆구리 접히는 부분이 약간 벌어져 있어 볼썽사나워 보인다.

아마 오래전부터 조금씩 닮아 해어졌나 보다. 그래도 그와 정이 들고 버리기 아까워 더 신고다녔다. 여유가 있어 두 켤레를 사서 번갈아 신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 켤레만으로 신다 보니 빨리 닳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높은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갑자기 구두의 오른쪽 살점이 툭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때 내 발도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난 상처 난 몸통을 가만히 비닐봉지에 넣어 병원으로 갔다.

우측 골반 뼈를 수술하여 건강을 회복하니 다시 새 구두가 되어 내 발목을 꼬옥 껴안았다.

그러다 며칠 후 이번에는 좌측골반 뼈가 빠져나가 또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 의사는 웃으면서 대장과 소장의 연결 부위가 닮아서 몇 달 못 가서 하직한다니 그는 회생 불능한 불치병에 걸린 걸까?

인류의 역사는 신발과 함께 발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시시대 신발은 신발이라기 보다는 뜨거운 모래나 들쑥날쑥한 돌이나 바위 등으로 발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이나 나뭇잎 등으로 발을 감싸는 수준의 것이었다.

이후 신발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계속 발전, 진화되어 왔으며, 고대 이집트나 중국 외에 세계의 문명화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새로운 신발이 나타났다.

이때에도 발의 보호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간의 인연의 시작과 끝도 구두가 그 수명을 다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만나고 헤어진 무수한 사람들, 낡아 해진 구두를 보면서 인연의 깊이를 생각해 보았다. 내 발을 거쳐 간 구두가 몇 컬레인지, 나와 인연을 시작하고 끝맺었던 사람이 몇명인지 모르겠다.

문득 신발장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구두를 꺼내 볼 때가 있듯 과거 속의 인연도 그렇게 꺼내보고 싶다.

이제 두 번의 수술을 통해 신었던 구두의 수명이 거의 다 되었나 싶다. 수년을 나의 발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 온 어느 날 고약스런 빗물이 옆구리를 살며시 파고들었다.

수명을 다한 구두를 쓰레기봉투 속에 넣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비스듬히 누워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수년을 나의 발과 함께해온 그의 생애가 오늘 새벽이면 환경미화원의 손에 이끌려 나락에서 열락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당신은 누구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갈 길을 안내해준, 희로애락을 함께 한 내 분신이었다고 말하리라. 구두 속에서 내 발은 여름해같이 불타오르고, 구두 속에서 삶은 언제나 실감나고 즐거웠었다.

구두는 전조등 불빛처럼 욕망을 비추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외출시켰다.

너는 나의 분신이었다. 내 발과 오래토록 인연을 함께한 넌 나의 오랜 친구였다.

지상을 더없이 사랑하게 만드는 구두. 지상을 떠날 때 해를 향해 날아갈 구두.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내 희망 한 켤레야!

신영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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