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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 하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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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 하나라도
  • 전민일보
  • 승인 2020.01.14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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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첫눈이 내린다. 싸라기눈인가 하면 함박눈이고, 함박눈인가 하면 어느새 눈은 제 모습을 거둔다. 눈이 술래잡기를 하는가 보다. 바람을 동반한 눈은 운치가 모자라기 마련이다.

늘 내리는 눈은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흰 빛 언어'라고 추켜 줄 수 없다.

잿빛 하늘에서 횐 떡가루처럼 쏟아지거나 흰 매화 꽃잎처럼 사뿐사뿐 내리는 눈이어야 제격인데, 오늘 내리는 눈은 그런 자태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도 눈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는 기분은 즐겁다. 송이송이 내리는 눈발은 젊은 날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여인의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아! 얼마나 즐겁고 살맛 나던 시절이었던가.

눈이 없는 겨울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삭막하고 살벌하며 허기진 계절일 수밖에 없는 겨울에 눈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조물주의 뜻이 마냥 고맙다. 쌀쌀한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하고 따뜻한 태양은 옷을 벗어제끼게 하듯, 눈은 나로 하여금 절로 어린 시절 추억의 앨범을 펼치게 한다. 지구가 지금같이 더워지기 전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겨울이면 눈이 자주 내렸고 또 많이도 내렸었다.

운동장에서 편을 갈라 신나게 눈싸움을 하던 일, 눈사람을 만들며 숯검정으로 눈과 코와 입을 적당히 배치하던 일, 그리고 눈 쌓인 야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를 하던 일이 어제 일인 듯하다. 눈이 나를 어린이로 만든다.

눈 내리는 날이면 등 하교 길부터 걱정을 하고, 눈의 낭만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 채 시험지옥에서 허우적거리는 요즘의 어린이들에겐 백설공주 이야기만큼이나 허황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는지….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어린 시절에는 꿈이 컸었다. 《백범일지》를 읽고 나서는 김구 선생을 닮고 싶다는 꿈을 간직한 적이 있었고, 때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꿈은 내가 성장함에 따라 자꾸 변했던 것 같다. 운동장에 가면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면 배우가, 음악회를 구경하면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내 키가 자라면 자랄수록 거꾸로 내 꿈의 키는 작아졌다. 마치 눈사람이 햇빛에 녹아 자꾸만 작아지듯 소년시절의 꿈은 청년시절을 거치고 장년시절에 접어들면서 왜소해지고 현실에 가까와지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용한 점쟁이가 아니고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질문이 될 것이다. 내가 기대하는 꿈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때로는 어떤 변혁이 내앞에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내가 방송계로 방향을 바꾸었던 일도 우연이고, 민방(民放)에서 잔뼈가 굵은 내가 서슬 퍼렇던 군사정부 시절 방송 통폐합조치로 인해 KBS로 옮기게 되었던 일도 나로선 상상 밖의 우연이었다. 이런 변화가 앞으로 또 없으리란 확증도 없는 일이 아닌가.

'우연이란 예측하지 못한 필연이다.' 라고 갈파한 이가 있었다. 대학시절 철학개론 강의 시간에 얻어들었던 이 한마디가 오늘따라 되새겨진다.

우연과 필연-. 이 두 낱말은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은 동일개념으로 파악하고 싶다. 나의 지나온 과거가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연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창조하신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필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란 운명의 레일 위를 달리는 기관차일 테니까.

사람의 일생이란 어쩌면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그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가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작가가 써놓은 대본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람의 일생이란 것도 운명의 여신이 짜놓은 각본대로 살다가 한 줄의 부토로 돌아가는 게 아닐는지-.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내린다. 바람결이 잔잔하다. 멋대로 휘날리던 눈발이 다소곳하다. 이대로 눈이 내린다면 온 산하가 하얀 이불로 뒤덮일 듯하다.

하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사악한 욕망의 찌꺼기들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누군가의 외침이 이명(耳鳴)처럼 들려온다. 그렇다. 그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날을 번뇌 속에서 허우적거렸던가.

작은 일 하나라도 성실하게 매듭 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굽일어 오른다. 홈런만을 노리다 스트라익아웃 당하는 것보다야 포볼이라도 골라서 출루하는 게 낫지 않던가.

아무리 큰 제방이라도 개미 구멍 하나로 무너진다는 우리네 속담의 의미가 이제야 가슴에 와 닿는다.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고장이 나면 큰 톱니바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법.
 
남이 외면하는 작은 일을 내 몫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싶다. 작은 일 하나라도 충실히 마름질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큰 일을 넘볼 수 있을 것인가.

김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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