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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깊이를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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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깊이를 안다는 것
  • 전민일보
  • 승인 2019.12.16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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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3일 공군 교육사령부에 입대했다. 훈련 중 중국 천안문에서는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초군사훈련과 특기교육까지 마치고 배치된 곳은 18전투비행단이었다.

처음 활주로에 내리던 순간의 황량함은 자대 고참을 만나는 순간 치열한 현실이 되었다.

고참이 들려줬던 말과 경고는 어느 순간 내가 후임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후임들이 또 다른 후임들에게 전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도 어느덧 개구리가 되어 있었다.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초심을 지킨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사람 인연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처음의 좋은 만남이 종국에는 파국으로 끝나는 경우도 적잖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첫 인상이 좋은 사람에 대한 경계가 커지는 것도 그래서이다.

식물체의 건전한 모주를 생산하기 위한 조직배양실 리모델링 사업을 맡았을 때다.

입찰로 선정된 업체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총괄 수주한 업체의 대표서부터, 건축, 시설, 전기부분 담당자들을 모아 당부의 말을 했다. 그때 앞장서 내 입장에 동조해가며 다른 부분 담당자들에게 훈수를 두던 사람이 있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다른 부분 담당자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오직 그가 문제의 출발이자 끝이었다. 그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들어야 했던 비난은 책임질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생각한다. 더 큰 문제는 악몽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리를 옮긴 내게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 하청을 받은 업체가 대금 미지급 문제로 민원을 넣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다.”

인간에 대한 신뢰의 고리가 그토록 약한 것이었음을 그 보다 더 절실하게 가르쳐준 사람이 또 있을까. 더불어 그는 내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 줬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지키지도 못할 말과 책임질 수 없는 행동으로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역설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회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불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대학 은사의 말씀을 현실에서 확인했다. 적어도 사회의 제도화에 있어서 그것은 여전히 대전제다. 고민은 일상 삶에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이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전직 권투 선수였던 그는 성실하고 친절했다. 비정규직 2년, 근무제한기간 때문에 떠나던 순간 그는 다행히 좋은 직장을 찾았다고 했다. 얼마 후 비정규직 근무자의 정규직화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1순위 대상자였다. 그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연락을 주겠지.’ 생각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사람이 변하는 구나.’

한참이 지나 술자리에서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내가 궁금해했던 이유가 거기에 담겨 있었다. 그가 지원하면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 선배가 2순위가 된다. 그가 내 연락을 외면한 이유였다. 내게 연락을 했다면 그는 자신의 결정을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 결정이 자신의 희생이자 가정이 있는 선배에 대한 배려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포장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그가 보여준 선택도 쉽지 않은 것이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에 있다. 그의 인간적 깊이에 놀람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를 만난다면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이 반가운 마음만 함께 하고 싶다. 인연은 때로 짧아서 더 아름다운 경우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가족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수많은 익명의 공간에서. 각각의 모습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요구하는 역할이 모습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혼란스럽다.

누군가의 어떤 모습이 그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또한 나는 타인에게 어떻게 투사되고 있을까.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정수를 보여준 업자와 인간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던 경석씨.

두 사람 모두 의미는 상반되지만 내겐 인생의 스승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알지 못한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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