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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선(善)을 확신하는 그대에게
전민일보  |  jmi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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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05  09: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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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짧은 기억으로 논문을 쓰는 것은 적절한 인용과 자료의 정확한 출처 확인이 거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 표절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바하(J. S. Bach) 이후 음악에서 완벽한 창작은 없다’는 말은 이제 글쓰기를 비롯한 창작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어쩌면 표절 혐의를 받는 작가 입장에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한 선의(?)의 표절이 억울할 수도 있다. 내 잡문(雜文)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있다. 옛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저평가다. 현대의 항해술로도 쉽지 않은 대양 횡단을 고대인들이 뗏목 수준의 배로 어떻게 건널 수 있었을까. 그러한 의문은 합리적이지만 한편으론 오만하다.

고대인들에겐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명의 이기와 항해술은 없었을지 모른지만 현대인이 따라할 수 없는 그들만의 항해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그들을 따라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현대인에겐 죽음의 항해가 될 것이다. 황룡사 구층 목탑을 복원할 수 없는 현대 건축학의 한계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사고하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선인들이 생각하지 않았으리라는 전제가 얼마나 오만하고 무지한가. 우리는 선인들이 쌓아놓은 돌 더미에 조그마한 조약돌 하나를 더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 돌 더미가 우리의 역량 덕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기루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가 공부한 로마사가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한비자(韓非子)>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궁금하다. 마키아벨리가 <한비자>를 읽었을까. 창작의 산고는 날로 심해진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작이 아닌 해석의 영역만 남게 될지 모른다.

해석은 변한다. 선현(先賢)의 해석에 내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내 졸렬한 견해는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비판 받게 될 것이다.

프랑스가 나치 부역자를 단죄하는 대표적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머리를 삭발당한 여인이 아기를 안은 채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독일군과 관계해 그 아이까지 낳은 것이 여인의 죄다. 이 사진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인의 반민족 행위와 그 여인을 심판하는 자들이 선택한 반인권의 충돌에 대한 가치판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거기에 더해 아기의 인권에 대해서도. 그것은 오늘을 사는 프랑스인이 몹시 불편해 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때로 역사는 광채의 평가 저편에 자리한 어두운 그늘에 대해 여백을 남겨둔다. 친일 반민족, 반인권, 반통일, 그리고 수많은 적폐 청산이 가져다주는 빛의 찬란함.

적폐 청산뿐이겠는가. 모든 혁명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빛의 광채가 그늘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모택동(毛澤東)의 광기어린 문화혁명조차 봉건잔재의 일소라는 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는 이유다. 반인권적이고 반여성적인 사진 속 어두운 행위가 민족정기구현이라는 빛 앞에서 정당화된 것도 다르지 않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조지 워싱턴은 왜 1백 달러 지폐 초상(肖像)이 아닌 1 달러 초상 주인이 되었을까. 고액권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인식에서 보면 미국인의 선택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많이 사용되는 지폐에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국부(國父)의 격에 합당하다는 사고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어떤 말이나 행위가 완벽한 선(善)이나 악(惡)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판단의 어려움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5만 원 권 화폐 주인공과 1달러 지폐 주인공에 대한 인식 차이는 다름과 이해의 영역 안에 있다. 과연 거기에 선과 악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조지 워싱턴을 1백 달러가 아닌 1 달러 화폐 초상에 넣은 것을 불경(不敬)과 악(惡)으로 규정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거기에 답은 존재할 수 없다.

<군주론>을 읽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는 영역은 별개다.

절대 선을 확신하는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해석을 독점하려는 그 만용 때문이다.

거기엔 부족한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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