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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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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해
  • 전민일보
  • 승인 2019.08.2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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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여질 때가 있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판단이 서지 않는 일이 있다.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 사람 말을 믿어야 할지 어떨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해야 하는 무수한 순간에 봉착한다. 지금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할 입장에서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몇 시간 정도 생각할 겨를이 있을 때가 있다. 어느 때는 며칠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도 하다.

나는 시급하지 않은 경우엔 가급적 판단을 유보하고 수첩에 그 내용을 기록해 놓는다.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일수록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 하며 졸속은 배제해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는 관련자들과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내 생각이 맞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날카롭게 분석을 하는 친구가 있고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의 의견이 옳았는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났다.

이제는 큰일이야 별로 없지만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판단하고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때는 나는 조금 뜸을 들이는 편이다.

“글세 말이야. 생각을 좀 해 보자고”

“알았어” 하고 좀 애매한 답변을 하곤 한다.

그리스의 피론은 회의론적 철학자다. 그는 어떠한 주장에 대해서도 그 반대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판단을 보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이나 사물은 입장과 상태, 조건 등이 다양하므로 일률적으로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없다. 매사에 판단을 보류하는 수밖에 없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조 정승을 지낸 강사상은 30년 동안 관직에 있었다. 그는 공론과 파쟁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벙어리가 된 채 콧등만 만졌다고 전해온다. 술을 좋아하여 술을 먹여놓고서 그의 주관이나 견해를 물어도 마냥 코끝만 어루만졌다고 한다.

나는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우물우물 넘기지 못했다. 예상되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방안과 추진계획을 수립하여 수시로 진행상황을 점검하였다. 그러나 집안 일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기고 아내의 뜻에 따랐다. 이제 퇴직을 하고 가정생활이 주가 되니 내가 진지하게 판단하고 추진할 일이 적어졌다. 세상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옳고 그른 것, 해야 할 일과 하지 말 것에 관한 판단을 될 수 있는 대로 유보하고 시속에 맡겨 살아가고 있다.

내가 요즘 많이 쓰는 말은 ‘알아서 해’다. 입에 달고 쓴다. 영화를 보러 가서 ‘이 영화를 볼까, 저 영화를 볼까?’ 아내가 물으면 ‘알아서 해’ 하면 된다. 나는 어느 영화라도 좋다. 스토리를 음미할 수 있고 장면 장면을 즐길 수도 있다. 아니면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TV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사극을 보면 따라서 보고, 막장 드라마를 보면 함께 본다. 이런 일 하나 못 들어 주면서 아내 사랑이니, 백년해로니 하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외식할 때도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면 ‘알아서 해’ 그런다. ‘탕수육 하나 더 시킬까?’ 하면 ‘그래’ 그러고 ‘팔보채는?’ 하면 ‘좋아’ 라고 대답한다.

어찌보면 줏대가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아무리 먹고 싶은 음식도 두어 번 먹으면 물리게 되고 배고플 땐 무엇이든 맛이 있는 법이다. 메뉴를 따지는 것은 배가 안고플 때의 일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특히 채소나 과일을 살 때도 전권을 아내에게 주어 ‘알아서 해’다. 머리를 쓰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게 그것인데 뭐 판단하고 선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숱한 세월동안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해온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묻는다 해도 이제는 ‘알아서들 하라’고 할밖에 없다. 어디에 묶이고 메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 스스로 그 덫에 빠지 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는 잘들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싶고 기업인들에게도 잘들 ‘알아서 해’하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김현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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