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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특집-김영호 애국지사 후손 김만성씨 인터뷰독립운동가 후손의 삶, 고달픔의 연속
정석현 기자  |  jsh0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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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3  17: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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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호 애국지사.

“부친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 왔다”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만난 김만성(82)씨의 온화한 웃음 속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강한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졌다.

그는 “비록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님의 평소 뜻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며 자긍심을 내비쳤다.

김만성씨의 부친인 김영호(1894~1940) 애국지사는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천도교 전주지구에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전주시내에 살포, 만세 시위를 촉발시켰다.

같은 해 8월 상경해 서울에 거점을 둔 대한국민회에 가입하고 대한국민회 전주지부를 설치해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다음해인 1920년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기 위해 대한국민회로부터 3·1운동 1주년 기념 경고문 50매를 받아 전주에 살포하고 상해임시정부로부터 탁송된 애국금통지서를 받고 모금활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 후 만주로 피신한 김영호 지사는 결국 1940년 꿈에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직접 보지 못하고 멀고 먼 타향에서 눈을 감았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두 살의 어린나이로 고향으로 보내진 김만성씨의 유년시절은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 때문인지 그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부족과 무관심에 강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비록 공직생활을 하면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왔지만 다른 대다수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해방이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숨어 다니며 독립운동을 한 탓에 당연히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정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그 후손들은 하루하루 가난과의 혹독한 싸움을 이어왔다”며 “그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 흘렀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나마 보훈대상으로 등록된 후손들의 사정은 좀 낫다”면서 “현재 전북지역 독립유공자는 10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보훈대상으로 등록된 사례는 250여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부분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고령으로 경제 활동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많은 예산을 들여 치르는 일회성 보훈 행사보다는 유족들에 대한 주기적인 생활 실태 확인 등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도 “불매운동 등 사회 참여도 중요하지만 독립 유공자에 대한 제대로 된 예우야 말로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강한 대응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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