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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우린 저걸 해 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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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우린 저걸 해 냈어
  • 전민일보
  • 승인 2019.07.2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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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혁명이 일어나던 그 날 루이 16세는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사냥에서 잡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

그리고 심상찮은 상황을 보고하는 시종에게 물었다. “폭동인가?”

돌아온 답은 이랬다. “아닙니다. 혁명입니다.”

자유·평등·박애, 그 숭고한 혁명정신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또한 공포와 함께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를 축출하는 선봉을 담당한 것은 어물전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생선을 다루던 그 칼로 근위병의 목을 자른 후 창 끝에 매달고 베르사이유를 초토화 시켰고 국왕 부부는 두 번 다시 베르사이유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혁명의 불길을 거세게 만드는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인민의 벗]을 발간한 장 폴 마라는 혁명완수를 위해 20만 명은 단두대로 보내야한다고 역설했다. 문제는 그가 증오에 차 써내려간 기사의 상당부분이 전형적인 거짓뉴스였다는 사실이다.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마라가 암살되었을 때 혁명정부는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린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에서 마라는 피에타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후 진행된 공포정치의 상징 기요틴(단두대)조차 평등과 박애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중세 참형은 귀족에게만 허용되는 예외적이고 인도적 사형방식이었다. 참혹하고 잔인한 수많은 사형방식을 고통이 최소화하는 형태로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한 것이 기요틴이다. 그럼에도 혁명이 부른 피는 너무도 과도했다.

사형제를 반대했던 로베스 피에르는 어느 순간 공포정치의 화신이 된다. “밀가루 값이 너무 올랐다.”는 말 한마디가 다음 날 발언 당사자를 단두대에 서게 만들었다. 이제 죽음의 그림자에서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왜 혁명을 말하는가.

혁명은 피를 부르지만 구악의 근원을 멸살한다. 그 잔인한 피를 통해 앙시앙 레짐을 일소한 프랑스인은 이제 똘레랑스를 말할 수 있게 됐다. 혁명은 이전 악에 대한 사회적 균열의 불쏘시개를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역설적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혁명의 부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엔 분단모순과의 기묘한 동거가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혁명의 기반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 분단의 씨앗까지 남겨놨기 때문이다.

윤치호 일기 속에 나타난 남과 북 사이의 골은 이념적으로 지역적으로 치유가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볼쉐비즘에 대해 어린아이까지 심취해있던 함경도와 전통적인 봉건사회의 틀 속에 갇힌 남원의 모습은 평안도와 기호지역 사이의 극단적 지역감정과 맞물려 남북 분단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한국은 여전히 친일과 독재 그리고 분단 현실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조차 모순되고 일관되지 않게 만드는 것도 그래서다. 인권을 말하면서 최악의 인권유린국가인 북한과 중국에 대해선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본에 대해선 그토록 당당하면서 중국에 대해선 시대착오적 중국몽을 찬양하는 현실은 또 어떤가.

국가와 민족의 가치는 보수의 영역이다.

“아베를 편드는 사람은 도쿄로 가라.”는 말이 진보논객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연구해볼 내용이다. 그가 아베를 편든다고 하는 내용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그 논리대로라면 그는 평양으로 가야한다. 조센진이란 말에 분노하면서 청와대 관계자나 국회의원이 아무렇지 않게 토착왜구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권감수성을 말하기 어렵다.

일본과의 문제는 중국이나 미국과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공녀와 환향녀의 치욕을 안겨준 중국이 위안부 문제의 일본과 무엇이 다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논의조차 친일 굴레에 가둬놓는다면 과연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처형 전 벽면에 걸려있던 인권선언이 새겨진 그림을 본 생 쥐스트는 로베스 피에르를 향해 이렇게 애기한다. “적어도 우린 저걸 해냈어.”

일유제 장태수 선생과 일송 장현식 선생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내 생각을 다시 돌아본다. 혁명이 필요할까. 어쩌면 나도 뫼르소가 될지 모르겠다.

우리는 후세에게 ‘적어도 무엇을 해냈다.’ 말할 것인가.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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