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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전민일보  |  jmi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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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10  09: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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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最古사서는 <삼국사기>다. 고려 김부식이 편찬을 지휘했지만 그것은 승자인 신라의 기록이다. 열전에 백제인은 단 세 명만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라인이 선택한 인물이다. 주인공은 계백, 도미,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불꽃을 지키고자 했던 인물 흑치상지다. 그 중에서도 임존성에서 백제인에게 희망과 절망 모두를 선사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흑치상지는 조금 특별한 삶을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와 연관된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세조 2년인 1456년 양성지가 한 통의 상소를 올린다. 그는 왕에게 단군조선부터 고려때까지의 역대 왕과 인물 중에서 배향해야 할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백제 인물로는 시조인 온조왕과 흑치상지만 유이하게 거론되고 있다.

흑치상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 측 사서인 <당서>에도 보인다. 키가 7척을 넘고 용감하였으며 지략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백제 서부인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흑치상지 묘는 699년 중국 낙양에 개장되었는데 이 때 작성된 그의 묘지석이 1929년 발견된다. 여기서 흑치상지와 아들 흑치준이 원래 부여씨였으나 당나라에서 흑치로 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흑치상지는 최후의 백제인이자 동시에 당나라인이었다.

이 부분이 흑치상지에 대한 평가를 극과 극으로 하는 부분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하자 흑치상지는 처음에 부하들과 항복한다. 그런데 당군이 의자왕을 모욕하고 백성들을 약탈하는 것을 보고 주위의 추장 10여 인과 함께 달아난다.

그들이 의기투합해 백제의 부흥을 도모한 곳이 바로 예산에 있는 임존성이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온지 열흘이 되지 않아 합류한 사람이 3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소정방은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한다. 아울러 주변 200여 성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저항은 오래가지 못한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회유하자 결국 유인궤에게 항복한다.

이후 흑치상지는 당에 들어가 양주자사 등을 역임한다. 더불어 여러 차례 정벌에 종군해 전공을 쌓고 작위와 상도 받는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행복하지 못했다.

흑치상지는 모반을 도모했다는 모함을 받고 교수형을 당한다. 그나마 위안이 될 만한 것은 후일 누명이 벗겨져 복권된다는 것이다.

사서에 나타난 흑치상지에 대한 인간적 평가는 긍정적이다. 그의 성품을 알려주는 짧은 일화가 하나 전한다.

어느 날 그가 타던 말이 한 병사에 의해 매질을 당한다. 그것을 본 어떤 이가 그 부하를 처벌하라고 얘기한다. 이때 흑치상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찌 개인적인 말로 관병을 매질하겠는가?” 또한 자신에게 돌아온 상품은 휘하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자신은 재물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흑치상지가 죽게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했다고 한다.

마지막 백제인 흑치상지는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닮아있다. 두 사람 모두 단군 후손이었지만 당나라인으로 살다 최후를 맞이한다.

흑치상지가 돌궐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모습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원정에 나섰던 고선지를 떠올리게 한다.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나라군은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압바스 군에게 패하기전까지 승승장구했다.

이 전투 결과는 고선지 개인은 물론 세계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제지공이 압바스 군에게 포로가 됨으로써 제지술이 아랍으로 전파되고 이후 유럽에까지 건너가게 된다. 인류 문명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 순간이다.

두 사람의 비극적 최후도 다르지 않다. 흑치상지가 그랬듯 고선지도 안녹산 반란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모함을 받고 처형되기 때문이다. 

임존성의 흑치상지에 대한 평가는 그가 이후 당나라에서 보여준 모습과 함께 한국사에서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임존성은 백제인에게 마사다(Masada)와 같은 곳이다.

마사다가 로마군에게 점령되면서 유태인은 2천년 동안의 디아스포라(Diaspora)에 오른다.

흑치상지의 선택은 그 개인은 물론 임존성 백제유민의 삶을 규정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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