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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리디노미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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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리디노미네이션
  • 전민일보
  • 승인 2019.06.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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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교각 중에 대교(大橋) 아닌 다리가 몇인가. 대한민국 전체로 범위를 넓힌 다면 얼마나 될까. 호칭의 인플레이션은 또 어떠한가. 영제국을 대영제국으로 부르는 것이나 영국 박물관을 대영 박물관으로 부르는 것도 거기에서 크게 멀지 않다. 그럼 표현은 어떠한가.

거리에서 현수막을 하나 봤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태양광 발전사업 죽음으로 반대” 비장미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 그리고 기권까지 모두 개인의 의사결정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반대를 공중에게 표현하는 행위도 당연히 포함된다.

대교 아닌 다리가 없고 인플레이션이 없는 호칭이 결례가 되는 것은 자부심의 발로와 존중이라고 이해하자. 그렇다면 죽음이 빠진 항의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태양광 발전사업만 죽음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수자원보호구역을 지정했다고 도지사에게 피로써 보복하겠다고 하는 것이나 관용구가 되어버린 결사반대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쯤 되면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는 무슨 표현을 통해 결의를 나타낼 것인지 의문이다.

화폐에만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국인에겐 표현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절실하다.

다양하고 강도 높은 욕설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의 언어적 표출은 다른 문화권에서 흔히 발견할 수 없는 특성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반대함에 있어 결사라는 수식어가 빠지면 의사표현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고도 그와 무관치 않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특성을 ‘국화와 칼’로 비유했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국화와 칼은 어느 일방이 긍적적이고 또 다른 일방이 부정적인 면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화와 칼 모두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발현한 주목할 사항 하나가 있다. 일본인의 표현 방식이다.

일본에는 욕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큰 욕이 한국말로 ‘바보’라는 표현정도다.

한국에서는 때로 연인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그런데 일본인에겐 그것도 커다란 모욕으로 거의 들을 수 없는 말이다.

한 일본 전문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그 수많은 욕을 일본인에게 통역해 전달하면 거의 기절할 겁니다.”

일본인은 칼을 통해 사람을 베지만 한국인은 말과 글로 사람을 살상한다. 한국사의 수많은 장면에 등장하는 설화(舌禍)와 필화(筆禍)는 일본사에서의 비극적이고 잔인한 모습과 비교해 그 처참함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 연장선상에서 호전적인 일본인과 평화애호민족 한국인이라는 규정도 당위론은 물론 존재론 측면에서도 면밀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호전성과 평화애호민족의 의미는 국화와 칼만큼이나 양면적이면서 또한 각각이 다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은 호전적이고 붓은 평화를 말한다는 이분법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내 사유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명신록(名臣錄)》을 편찬하면서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을 싣지 않고 계곡(谿谷) 장유(張維)를 실었더니,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편지로 그 부당함을 책하였다.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같은 시대의 사실인데도 듣고 본 것이 서로 달라 넣고 빼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오랜 세대가 흐른 뒤에 전해 들어서 그릇되기 쉬운 것 임에랴.”

놀랍지만 이긍익의 이 말은 오늘 한국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가 보고 듣는다고 그 의미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이긍익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나는 이 책에 열성조의 말단에 각기 그 시대 명신의 사적을 약간 붙여 기록하되, 상신(相臣)과 문형(文衡)은 현우(賢愚)를 불문하고 모두 차례대로 기록하였고, 유현(儒賢)과 명신도 기록에서 보고 들은 대로 기재해 넣어, 감히 사견으로 어떤 이는 올리고 어떤 이는 깎은 것이 아니니, 이는 널리 수집하여 후세에 완전한 글을 저술할 분에게 고징(考徵)의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이긍익은 자신의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다. 극단적 표현이 일상화하는 사회는 그 자체로 충분히 불안하다. 붓이 칼보다 평화애호적임을 증명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절제된 표현이 울림을 줄 수 있을 때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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