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3월 5일 군산에서 “대한 독립 만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과 나흘 전 서울 탑골공원에서 처음으로 울려 퍼진 뒤 한강 이남에서 벌어진 첫 만세 시위로 기록된 '군산 3·5 만세운동'이다.
군산의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학생과 교사, 예수병원 직원, 구암교회 신도가 주축이다.
시민 10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을 열망하며 거리로 나왔다.
3·5 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가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거사를 주도했던 4월 1일보다 많이 앞선다.
원래 3·5만세운동일은 1919년 3월 5일이 아닌 장날인 3월 6일(음력 2월 5일)로 예정됐었다.
서울에서 온 청년학도 김병수로부터 선언서와 함께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 이두열, 김수영, 박연세 등은 같은 학교 직원들과 의논해 3월 6일 군산장날을 기해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3월 5일,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일본경찰 10여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해 학교 건물 안을 샅샅이 수색했고 등사기와 태극기, 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각종 문서 등이 발견되면서 박연세와 이두열이 끌려가게 된다.
이에 나머지 교사들과 예수병원 직원들을 비롯한 학생들이 ‘나도 잡아가라!’며 강하게 항변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그렇게 군산의 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박연세, 이두열 교사가 연행됨으로써 거사의 계획이 자칫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 김윤실 교사가 나머지 교사, 학생들과 긴급회의를 가져 거사일을 하루 앞당겨 5일에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결의한다.
긴급회의를 마친 이들은 예수병원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명, 학생 100여명, 멜본딘 여학생과 주민들 140여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여 섰다.
이들은 그간 극비리에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줬고, 영명학교에서 출발한 ‘만세운동’대열이 설애장터 근처에 이르자 이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여들기 시작해 순식간에 대열은 많은 인파로 늘어나게 된다.
이들은 군산경찰서 방면을 향해 다가가며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느새 군산은 ‘독립만세운동’의 물길에 휩싸이게 된다.
이날 군산에서 일어난 3·5만세운동은 호남지방은 물론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봉기로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군산시 관계자는 "3·1운동 역사공원 일대는 영명학교와 구암교회 등이 있던 곳으로 3·5만세운동, 옥구 농민항쟁, 임피 만세운동 등 역사적인 곳“이라며 ”3·5만세운동은 한강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군산에서의 시위로 만세운동이 전북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명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