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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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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 전민일보
  • 승인 2019.02.2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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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수씨는 페인트를 제조하는 회사에서 20대 초반부터 30여 년간을 다녔다. 젊어서는 수많은 현장서 일을 했고, 해외 건설 붐을 타고 수출이 잘 될 때에는 공로패도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 온 동료들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달수씨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제나 저제나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임원승진이 있다는 소식이 사내에 퍼졌다. 여기저기서 누가 임원이 되느냐 설왕설래했다. 소폭이라는 말에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이야말로 승진을 하겠지?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후배에게 밀렸다. 설상가상으로 건설 경기 악화로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원치 않게 퇴직을 하게 됐다.

그 동안 김달수씨에게 회사는 삶의 전부였다. 눈만 떴다하면 회사로 달려갔고 오밤중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었다.

아이들 얼굴을 언제 봤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언젠가 일요일 아침 밥상에서 막내딸이 ‘아저씨는 누구세요?’ 하자 온 식구들이 웃었다. 농담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아차!’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 해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이게 사는 일인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몸과 마음을 회사에 바쳤지만 돌아온 것은 퇴사 명령이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을 외면하는 회사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송별회 자리에서 후배 하나가 선배님의 실력과 경력이면 어느 회사에 가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배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술을 들이 부어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은 더욱 또렷했다. 지금 퇴직하는 것이 그마나 다행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아직은 나이가 있으니 새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빈둥빈둥 놀다보니 어느 덧 반년이 되었다.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어도 딱히 갈 곳이 없다. 아파트 앞에 있는 공원으로 나갔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유리알 같았다. ‘하늘이 참 맑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이었다. 순간 하늘에 파문이 일었다. 김달수씨는 ‘이 시간에 내가 왜 여기 있지? 이대로 주저앉아?’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고용센터에 갔다. 현관에 비치된 구인 광고 전단지를 뒤적이었다. 인터넷 구인란도 꼼꼼히 살폈다. 이력서를 작성해 여기저기 제출했다.

심지어는 교차로에 구직 광고를 냈지만 면접이라도 해 보자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구직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김달수씨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화가 났다. 강퇴를 당한 직장에 대해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강퇴 당할 때 누구 한 사람 자기편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자 남아있는 동료들도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실력이 있는 자신은 강퇴 시키고 아부만하는 조조 수염 같은 친구들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 열이 뻗쳤다.

요즘은 하찮고 작은 일에도 짜증을 냈다. 아내도 김달수씨의 눈치를 살피고 자식들은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김달수씨는 좌불안석이었다. 새벽이면 눈을 뜨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일찍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있는 본인의 모습도 싫어졌다. 가족 관계도 소원해져 지기 시작했다.

외톨이가 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평생 하던 일이 없어지면서 잉여 인간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김달수씨는 한숨만 나왔다. 김달수씨가 아내에게 이것저것을 참견하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아내에게는 ‘은퇴남편증후군 Retired Husband Syndrome’이 생겼다. 머리가 아프다고 눕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김달수씨는 매일 출근하던 직장이 없어지면서 극도의 상실감으로 인해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고 질병이 생기는 은퇴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명함도 사라지고 갈 곳도 없어졌다.

소외감과 고립감이 생기자 소화도 안 되고 머리도 지끈거린다.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표출하기도 했다. 의지처가 없어졌다는 것은 미물들이 은식처를 뺏긴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다 보니 쉽게 짜증을 내고 감정이 소진되어 우울하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에너지가 고갈되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번아웃증후군 Burnout Syndrome’을 겪는 것이었다.

막내딸이 꽃을 한 다발 안고 들어왔다. 김달수씨는 무슨 꽃이냐고 막내딸에게 물었다. 막내딸은 거실 구석에 있는 유리병을 가리키더니 저 병에 꽃을 것이라고 한다. 막내딸이 유리병에 꽃을 꽂자 순간 예쁜 화병이 되었다.

갑자기 거실이 환해졌다. 향기가 코를 찔렀다. 김달수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유리병이었다. 거실이 환하고 거실에 향기가 꽉 찬 것은 꽃이 아니라 유리병이 있기 때문이라고 김달수씨는 굳게 믿었다.

강퇴당한 김달수씨는 깨지기 쉬운 '유리병‘이었다.

정성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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