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3-29 13:54 (금)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가 불편한 이유
상태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가 불편한 이유
  • 전민일보
  • 승인 2019.01.29 1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는 로마를 건국한다. 그런데 로마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세대를 낳아줄 여성이 부족했던 것이다.

여러 방안이 여의치 않자 로마가 선택한 마지막 수단은 납치였다. 그리고 사비니 여인들이 그 대상이 된다. 그로부터 3년 후 사비니 왕인 타티우스가 복수를 향해 로마로 진격했을 때 그의 딸인 헤르실리아는 로물루스의 아내이자 아이들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장(戰場)의 한 복판에 사비니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 팔로는 아버지를 그리고 다른 한 팔로는 남편을 막아선 체 이렇게 절규한다.

“과부가 되거나 고아로 사느니 죽는 게 낫습니다.” 사비니의 딸이자 로마의 아내가 된 그들은 살육을 멈추고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데 성공했다. 로마는 그런 여정 속에서 성장했다.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799년으로 나폴레옹이 집권한 바로 그 해다. 프랑스 대혁명과 테르미도르반동을 거쳐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장하는 혼란의 시기에 이 그림이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명확하다.

바로 갈등의 봉합과 미래로의 전진이다. 그런데 왠지 불편하다. 사비니 여인들의 행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여기서 확인 할 수 있는 것 중엔 스톡홀름 증후군도 있다. 또 하나, 그 의도나 방법과는 무관하게 일단 고착화된 현상유지에 대한 정당화다.

약탈과 납치에 의한 강간과 그로인해 생긴 아이들로 인해 이뤄진 가정이 결국 합리화되는 과정을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후 동일한 방식의 가해 행위에 대한 충실한 교과서가 되었다.

유고 내전당시 이뤄진 살육과 강간도 로마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강간해 자신들의 후손만을 남기겠다는 사고와 그에 근거한 행위는 수 천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의도나 방법이 아닌 결과로 남고 정당화 될 것이라 믿었다.

역사는 증언한다. 선한 의도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상황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문제는 한 번 나온 결과는 그것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과는 무관하게 오랜 시간 강고하게 현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쿠르드족의 비극도 그렇다. 유럽인들이 거의 유일하게 존경하는 무슬림이었으며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이 아닌 연옥편에 그를 포함시킬 정도로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살라딘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아랍의 왕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쿠르드족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위대한 왕을 배출한 쿠르드족이 정작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터키와 이라크 그리고 시리아 등지에서 여전히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사담 후세인 시절 화학무기에 의해 숨져간 쿠르드족의 어린 모자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그 모든 나라에서 박해를 받고 있다. 터키군이 쿠르드 반군을 살해한 사진을 보면서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독립군을 떠올리게 된다. 미군이 시리아에서 철수하면 결국 가장 큰 피해를 볼 대상도 크루드족이 될 것이다.

사비니 여인이나 쿠르드족 문제는 우리와 동떨어진 얘기일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 8도 분할론은 조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됐다. 그리고 그것은 구한말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39선과 38선 논의로 이어진다. 해방 후 그어진 38선은 오래된 미래의 데자뷰였던 것이다.

개인은 물론 국가 영역에 있어서도 일단 고정화된 현상은 타파하기 어렵다. 사비니의 무력응징이 그렇고 쿠르드족의 독립이 그렇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현실 역시 다르지 않다.

공녀와 환향녀 그리고 위안부와 기지촌까지 한국역사는 수많은 사비니 여인을 만들어온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중재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로 포장되어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명분도 약하다. 그럼에도 더 이상 이런 중재는 없어야 한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로마인에겐 아름다운 결말이지만 사비니인에겐 감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청년 김대중의 정신을 이어가는 한동훈
  • 신천지예수교 전주교회-전북혈액원, 생명나눔업무 협약식
  • 남경호 목사, 개신교 청년 위한 신앙 어록집 ‘영감톡’ 출간
  • 우진미술기행 '빅토르 바자렐리'·'미셸 들라크루아'
  • '여유 슬림컷' 판매량 급증! 남성 건강 시장에서 돌풍
  • 옥천문화연구원, 순창군 금과면 일대 ‘지역미래유산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