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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이 어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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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이 어울리네요
  • 전민일보
  • 승인 2019.01.23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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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옷을 자주 입지는 않았다. 보라색을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보라색이 참 어울린다고 말해줄 때는 실은 은근히 기뻤다. 흔히 보라색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색이 아니라고 하던데, 혹시? 엉뚱하게도 나는 혼자 행복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내 생각엔 보라색은 잘 입으면 참으로 고상하게 보이는데 잘못 입으면 좀 야하게도 보이고 촌스럽게도 보이는 색깔이다. 나는 야한 것과 촌스러운 것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거부감이 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보라색을 섣불리 입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건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색상의 느낌이란 그 위치, 주위 상황과의 조화에서 오는 착시일 수 있다. 어찌됐든, 나는 보라색의 그 한없이 그윽하고 우아한 색감, 그 자욱한 분위기에 매혹되곤 한다. 보라색은 보통 희고 긴 목을 지닌 귀부인이 자수정 목걸이를 했을 때 제격으로 어울린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선골피부를 갖지 못해서 보라의 극치미를 살릴 수가 없다.

비극적 오페라에서 비통에 찬 아리아를 열창하는 여주인공의 기품 있는 보라색 긴 드레스와 그녀의 고뇌에 찬 그늘진 눈 화장은 말할 수 없이 분위기 있다.

색깔은 개인적 취향이기에 보라색에 대해서 내가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른 봄 양지쪽 돌담 사이에 피어나는 보랏빛 제비꽃은 아련한 그리움을 안은 귀여운 여인 같다. 또 늦여름 땡볕에 농익은 포도 알은 바다보다 짙은 진보라, 암자색이다. 그래서 진한 보라색을 포도색, 가지색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이미지를 그렇게 실물로 연상시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는 것 같다. 중세 시대만 해도 너무 귀해서 감히 넘볼 수 없던 색깔이 보라색이었다는데 이젠 주위에서 많은 보라색을 볼 수 있다. 꽃들만 챙겨 봐도 붓꽃과의 아이리스나 제비꽃, 무스카리, 라일락, 구절초, 별개미취, 라벤더 등이 곳곳에서 피어있다.

아련한 순정 같은 연보라색에서 슬픈 멍 같은 진보라색까지 그 빛깔의 농담은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하다.

그동안 보라는 은연중에 격이 높은 위상을 지녀온 셈이다. 서양사극을 보면 황실에서는 존엄의 상징으로 보라색과 황금색을 주로 애용하고 있었다. 진한 보라색 비로드 천의 부드럽고 묵직한 그 후광은 참으로 화려하고도 중후한 위상을 보여준다.

새삼스레 거울을 보며 엉거주춤 몸매를 비추어본다. 이 나이에 무슨 옷을 걸친들 맵시가 나겠는가? 그런데도 보라색이 내게 어울리지 않나 이쪽저쪽 허리를 꼬아본다. 이렇게 용기를 내보는 것도 주위의 응원 덕분이다.

보라가 너무 잘 받는데요. 그 빛깔 참 어울리네요. 이런 코멘트를 해준 사람도 있었으니까. 사실 좋아하면 닮아간다고 하던데 어쩌면 보라가 내 정체성의 어느 부분 같기도 하고.... 그래 보라가 울린다면...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혼자만 아는 미소를 살포시 지어본다.

거울 속 여인이 빙그레 끄덕이고 있다.

송종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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