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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곧 정의가 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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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곧 정의가 되는 사회
  • 전민일보
  • 승인 2018.12.19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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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내 기억을 복기해보니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 되던 해였던 것 같다. 친구를 만나러 서울 신림 9동에 갔다.

당시 그 친구는 사법고시 2차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마침 친구는 스터디를 하는 동료들과 어느 호프집에 있었다.

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친구와 자리를 나왔다. 그리고 몇 달 후 신문에 나온 사법고시 수석합격자 인터뷰를 봤다.

친구와 함께 있던 여학생이었다. 나머지 동료들도 시차가 조금 있지만 모두 합격 소식과 함께 판검사의 길로 진입했다.

친구만 제외하고. 그 후로도 친구는 외롭고도 처절하게 2차 시험을 몇 차례 더 봤지만 끝내 그 길을 가지 못했다.

어느 날 친구가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물론 친구는 합격했다. 그런데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번에 놀란 게 있다. 시험이 어려워 합격자가 적다고 재시험을 요구하는 것도 그렇지만 당국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필기시험에서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불합격에 대해 재의를 요청하고 재시험을 요구해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은 게임의 룰 자체를 만드는 과정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한다면 게임의 룰을 준수해야 할 대상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바꾸라고 요구하고 그것을 관철 시킨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힘은 과연 무엇일까.

몇 번을 생각해봐도 그것은 다수의 논리가 승리한 것이다.

만일 친구가 사법고시 2차 시험의 난이도나 과락 규정의 부당함을 근거로 재시험을 요구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양적완화는 화폐정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과정도 결국은 수의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종교에서 성직자 입문과정을 엄격하게 하는 종단과 남발하는 종단 중 결국 세상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후자가 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내 이런 생각 자체가 불순하고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제왕이 지배하던 시절에도 다수의 힘에 반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박자(抱朴子)] 가둔(嘉遯)에 나오는 내용이다.

“보잘것없는 재주를 가지고서 부화뇌동하는 자들을 바로잡고 자신이 옳은 것만 믿고서 다수의 잘못됨을 성토하려 한다마는, 조그마한 갖풀로는 탁한 황하를 맑게 할 수 없고, 물 한 동이로는 소구(蕭邱)의 불길을 잡을 수 없는 법이다.” 이런 경고가 중국에만 있겠는가.

조선 효종(孝宗)의 장인인 장유(張維)도 군적(軍籍) 문제를 언급하면서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왕에게 이렇게 진언하고 있다.

“대저 누대(累代)를 내려온 사가(士家)의 자제로서 1부(部)의 글 하나도 제대로 통효(通曉)하지 못하여 이렇듯 군색하게 되고 말다니, 이는 진정 그 자신의 죄라고 해야 하겠습니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는 원망을 품은 독기가 아래에서 축적되는 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만 있어도 난처한 일인데, 더구나 다수의 무리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 그러니 이 일을 어찌 돌보아 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아마도 공인중개사 재시험의 논리도 이미 장유의 이 상소문 속에 오래 전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

제왕이 통치하는 전제주의 체제하에서도 이럴진대 다수의 대중이 주인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인가. 그렇다면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아직 미진한 사람이다.

민주주의는 분명 다수의 의견이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거기엔 전제가 있다. 그 의견이 그 자체로 정의로움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의지와 무관하게 자신과 집단의 이해만을 정당화하는 다수결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다수의 힘이 절제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 사후 그리스가 보여준 오래된 미래 모습이다.

내 무엄한 발언이 불편했다면 밀(J. S. Mill)을 인용하고자 한다.

“한 사람이 아흔 아홉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없듯이 아흔 아홉 사람이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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