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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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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선심
  • 전민일보
  • 승인 2018.11.21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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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한국인 소녀가 외국인 근로자에게 성폭행 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됐다. 그런데 당시 이 땅의 언론을 포함해 그 누구도 그 어린 소녀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그러한 사실을 대중매체를 통해 알리는 것이 ‘인종 혐오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이런 국격을 가진 나라가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그런데 그런 숭고함 뒤에 숨어있는 소박한 의문이 하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끔찍한 공포속에 죽어간 소녀와 남겨진 가족들의 인권은 어디에 있는가. 범인을 잡아 교도소에 넣었으니 죄 값을 다한 것인가.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인 범인이 수감돼 있는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전도연을 면회한 범인은 성인군자가 되어 담담히 이렇게 말한다.

“그(하나님) 앞에 엎드려가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순간 말을 잊은 그녀는 천천히 되묻는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요?”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는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만일 신(神)의 용서가 피해자의 인권에 우선한다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하물며 신도 아닌 그 누가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용서의 범주는 때로 광범위하다. 피해자는 범죄자에 대한 합당한 응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가해자에 대한 사형요구도 포함된다.

세상은 언제나 이상과 현실사이의 고민과 불완전한 해답사이에 존재한다.

사회나 개인이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영국 BBC 기자의 질문처럼 인권운동가 출신 대통령이 잔인한 독재자와 포옹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를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렇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해보자.

청년실업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체계적인 대책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기획난민과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국 보다 돈이 많은 일본이나 중동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 그토록 오려는 이유는 왜인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쇠사슬을 몸에 감은 채 자신들이 착취당한다는 그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을 더 이상 착취가 없고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자신들의 나라로 귀국시킬 의무가 있다.

청년들이 더럽고 위험하며 힘든 일을 안 하려 해서 외국인들이 필요하다는 말은 더 이상 ‘조자룡 헌칼’이 아니다.

발칸이나 중동은 물론이지만 스리랑카의 타밀족이나 미얀마의 로힝야족 문제와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하는 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현세대의 책무다. 현 상황은 미래 갈등요인에 대한 의식적 무시이거나 무책임한 낙관론으로 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자산가치 하락을 우려해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 건립까지도 반대하면서 당장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 공적문제에 대해서는 무한한 관용과 인내를 말하는 것은 결코 정도가 아니다.

모세는 람세스와의 대결을 통해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켰다. 거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사실이지만 그 전 상황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이집트인과 히브리인의 첫 만남은 결코 적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파라오와 요셉 사이의 신뢰와 호의가 히브리인의 이집트 정착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지역, 계층, 이념은 물론 작지만 포기할 수 없는 수많은 가치를 가지고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 땅에 타밀족이나 로힝야족과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올 수 있다. 그 상황은 단순한 관용과 다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 국호나 공용어는 물론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단군의 자손’이란 표현도 인종주의로 공격받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단일민족 신화는 단순히 생물학적 DNA 문제가 아니다.

몽골 침입 이전 고려사람 상당수는 자신이 고려인이 아닌 고구려, 백제, 신라 후손이라는 삼한유민의식의 잔상에 머물러 있었다.

단군은 한민족이 중국내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지 않은 구심점이었다.

권한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선심은 그 자체로 부당하다.

장상록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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