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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애호 민족과 호국불교의 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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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애호 민족과 호국불교의 부조화
  • 전민일보
  • 승인 2018.10.1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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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겐 평화애호민족이라는 오랜 신화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인의 과거는 물론 현재를 규정하는 근원적 도덕률인지 모른다. 그래서 일까.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당했지만 그들로부터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해군기지 건설은 평화에 반하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평화의 섬을 지켜 달라.’이토록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에게 전쟁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한국사의 수많은 고난이 과연 한국인이 평화를 사랑하지 않아서 연유한 것인가. 습근평(習近平)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한국은 원래 중국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일본을 향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그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침묵은 어떻게 해석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이 한국 불교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것임을 설명해야 하는 것만큼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른다. 조금 거칠지 모르지만, 종교의 존재이유는 내세에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불교는 특별하다. 미륵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칠성각(동류 포함)은 어느 사찰에나 존재하는 한국불교. 불교가 한국의 전통 샤머니즘과 타협해 만든 현세구복 신앙은 그렇게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불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녀의 수능시험을 위해 새벽기도에 열심인 기독교인에게서 연상이 되는 것은 단테의 [신곡]이 아닌 춘향전의 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정안수(정화수)를 떠놓고 이몽룡의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월매의 모습이다.

한국 불교의 현세구복 신앙이 샤머니즘의 전통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호국불교는 평화애호민족인 한국인의 방어기제가 종교에 투영된 기형적 형태다. 살생을 절대적으로 금해야하는 종교적 계율이 국가라는 모호한 개념체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파괴된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애호의 최고 극단에 존재해야 할 대상이 살상의 현장에 나서고 그것을 호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분명 어색하다. 그것은 평화의 왜곡이 가져온 심각한 부작용이다.

스님의 역할은 내소사의 여명 속에 울려퍼지는 청아한 독경소리 안에 있지 군인을 대신해 총칼을 드는 것에 있지 않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목탁이 아닌 총칼을 들게 했단 말인가.

영화 [안시성]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고구려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부정할 수 없다. 습근평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대륙의 통치자들에게 그것은 한국을 향해 넘어선 안 될 선을 상기시키는 강력한 경고였기 때문이다. 징키스칸의 손자이자 중국을 통일한 원 세조 쿠빌라이가 고려 원종에게 했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당 태종이 친정했지만 굴복시키지 못한 고려’ 후일 쿠빌라이는 외손자인 충선왕에게 묻는다. 당 태종과 자신 중 누가 더 위대한 황제인지. 그렇다. 당 태종은 단순한 황제 한 명이 아니다. 중국 역사상 수많은 황제들이 존재했지만 당 태종의 명성을 넘어서는 인물은 없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초반 명나라에서 조선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런 의구심을 가졌다.

‘당 태종을 물리친 조선이 어떻게 저토록 무력할 수 있단 말인가. 왜와 야합한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은 지금도 여전히 양만춘과 안시성 백성들의 피 값으로 존재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당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그 대가로 평화를 얻었다면 습근평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티벳과 신장이 그렇듯 한국도 중국 영토다.’

평화를 부정하는 자 그 누구인가. 러일 전쟁당시 촬영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걷는 일본군 두 사람 옆에 너무도 순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조선인이 지게에 짐을 지고 가고 있다. 전쟁을 하는 일본과 평화를 사랑하는 조선의 모습이 이보다 더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군인은 없고 짐꾼만 있는 조선의 평화애호만큼 공허한 것이 또 있을까. 평화애호민족과 호국불교의 부조화는 과거로서 족하다. 백번을 양보해 그것이 한국 역사의 일부분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해도 과연 미래에도 계속되어야할 유산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전쟁을 혐오한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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