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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뺄 것이 많은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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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뺄 것이 많은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 전민일보
  • 승인 2018.04.17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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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이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 된다.” 매번 인용할 때마다 생텍쥐페리의 통찰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렇다. 일례로 내가 알고 있는 지인의 범위를 새롭게 더하는 것은 그 어떤 완성과도 관련이 없다. 지인을 더 만들어가는 행위는 열린 상태를 말하고 그 자체는 미완이기 때문이다.

얼마만큼의 지인을 더해야 완벽한지에 대한 의문을 넘어 설혹 더함이 멈추었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페이스북 친구가 5,000명이면 더 이상 친구추가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완성을 의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인 중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범위를 좁혀가 더 이상 제외할 대상이 없는 상태는 그 자체로 완성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페이스북 친구가 단 10명뿐이고 그 중 누구도 뺄 대상이 없다면 그것은 완벽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빼는 것이 더하는 것에 비해 훨씬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에 있다.

[사기열전(史記列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에는 빈객이 서로 다투어 찾아오는 바람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가, 파직된 뒤에는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아 문 앞에 참새 잡는 그물을 칠 정도가 되었는데, 다시 복관되매 빈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문에다 큰 글씨로 써서 내걸기를 ‘한번 죽고 한번 살매 우정을 알 수 있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하매 친구의 태도를 알 수 있으며,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해지매 속마음이 다 보이도다.’라고 했다.”적공(翟公)이 문에 내건 글씨에는 분노와 복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하지만 고난의 시기를 통해 지인들의 우정과 태도, 속마음까지 알 수 있었다면 적공(翟公)에겐 남는 장사였다.

문 앞에 참새 잡는 그물을 치면서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관계의 완성은 결국 뺄셈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하는 순간, 내 곁엔 누가 있을까? 참으로 오래된 질문은 2013년 한 여성 노숙인의 사망소식과 함께 되돌아왔다. 한국외대 불어과 60학번, 메이퀸, 외무부에 근무했던 커리어 우먼의 원조.

권하자라는 이름 대신 맥도날드 할머니로 불린 그녀는 죽기 전 캐나다에서 온 스테파니 세자리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은 당신이 유일한 가족이군요.” 그것은 권하자가 정의한 스테파니 세자리오와의 관계성이다.

나는 맥도날드 할머니가 선택한 삶에 대한 평가나 동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궁금한 것이 있다. 그녀가 살다 간 73년의 시간 속에 담긴 인연의 수와 그에 따른 각각의 사연은 어떤 의미를 남기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 스마트폰에 저장 된 전화번호의 모호함과 불완전함이 가진 관계성과 닮았을지 모른다.

모호함과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관계성을 대표하는 지표는 또 있다. 현재 페이스북 친구 4,956명, 그 중 103명이 내 생일을 축하해줬다.

4,956명은 어떤 분들일까. 그 중엔 내가 페이스북에 가입하게 만든 동기를 제공한 분도 있고 내가 친구신청을 한 분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은 물론이고 내 생일을 축하해준 분들조차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페이스북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인식하는 것과 비례할 것이다. 참으로 포말적인 관계 아닌가. 어찌 보면 알렉스 퍼거슨의 말처럼‘인생의 낭비’인지 모른다. 전화번호는 있지만 연락할 대상은 없는 관계성.

그런데 퍼거슨의 말보다 훨씬 섬찟한 것은 따로 있다. 포말적인 관계가 축복을 가져다주기는 어려워도 재앙으로 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안희정 성추문과 관련 피해자에 대해 부적절한 언급을 한 선배는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로인해 그가 지불한 대가는 컸다. 그의 존재가 페이스북에서 사라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매장됐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아직도 뺄 것이 많은 삶을 살아야 할 나는 누군가에게는 뺄셈의 대상이 될 것이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뺄셈의 결과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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