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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송시열의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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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송시열의 나라인가
  • 전민일보
  • 승인 2018.03.27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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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불편하다. 보다 적확하게 말한다면 불안하다. 많은 흠과 실수를 안고 사는 내게 언제 어떤 주홍글씨가 새겨질지.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올 수 있다.

페이스북에 남긴 글 한 조각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정의라 생각하는 것에 작은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서, 아니 보다 치명적인 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추궁을 통해서일 수도 있다. 사회에 정의가 넘쳐난다.

죽음 앞에서 ‘자살할 자격도 없다.’고 단언하는 사회에는 정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까.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의 이념적 굴레 속에 사는지 모른다.

‘송시열의 나라’, 조선 후기 3백년을 지배했던 그 이념은 망국으로 종말을 고했을까. 송갑조는 열두살이 된 아들 송시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율곡과 사계 그리고 신독재를 있는 우암의 학통은 이미 그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암에게 단 한 사람의 성인을 얘기하라 한다면 그는 단연 주자다.

주희와 송시열, 둘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주자대전]과 [송자대전], [금]과 [청], [정강의 변]과 [병자호란], 남송의 효종과 조선의 효종, [임오봉사]와 [기축봉사] 그리고 북벌론 까지. 남송의 존립에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 주자였다면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이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은 우암에게서 나온다. 우암은 [기축봉사]에서 주자의 [임오봉사]를 인용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에 흔치 않은 큰 공은 세우기 쉬우나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보존하기 어렵고, 중원의 오랑캐는 쫓아내기 쉬우나 한 몸의 사의는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때문에 감히 구차하게 대단한 말을 하여 폐하를 속일 수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사욕을 극복하여 정사를 수행하시면, 진실한 공효를 점차로 이룰 수 있습니다. 대개 이른바, 진짜 [역경(易經)]에 정통한 자는 [역경]을 말하지 않고, 참으로 회복에 뜻을 둔 자는 칼을 어루만지고 손바닥을 치는 그러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성현의 말씀이지만 공허하고 무책임한 사변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금과 청에 대한 남송과 조선의 정신승리 말고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적 토대가 남송과 조선의 명맥을 유지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남이 보는 내 모습은 적잖은 경우 불편하다. 때로 거기엔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나아가 외면하고픈 객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적어도 타자가 본 내 모습이 100의 진실을 담고 있진 못할지라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을 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그렇고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가 그렇다. 여기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가 쓴 책 이름은 이렇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그는 한국사회를 이렇게 규정한다.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과 흥분은 항상 여기에서 유래한다.”

모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이(理)함유량, 곧 ‘도덕 함유량’에 따라 평가되는 한국사회에 대한 오구라 교수의 진단은 이렇다. “그것은 한국인에게 축복이자 저주다.”일본에 여전히 존재하는 천민집단 ‘부라쿠민’과 조선의 천민집단인 ‘백정’의 소멸을 바라보는 그의 진단은 축복일까.

원로 사학자 한 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노비후손이다. 한국사에 존재했던 노비계층이 명확한데 누구도 자신의 조상이 노비라 말하지 않으니 나만이라도 노비 후손이라 해야 하지 않겠나.”

역설적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백정’은 구성원 모두를 왕족이나 양반의 후손으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아직도 성리학의 이(理)가 지배하는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래서인지 모른다.

때로 세상은 정의의 궁핍이 아닌 과잉에 의해 파괴된다.

나는 멸균사회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장상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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