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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마늘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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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마늘을 꿈꾸다
  • 전민일보
  • 승인 2018.03.21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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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강의를 마쳤다. 고덕산 산 그림자가 고삐 풀린 소처럼 운동장을 뛰어 다녔다. ‘마음을 다스리는 글쓰기’시간에 한 학생이 물었다. “교수님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나요?” 주저하지 않고 산책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토스트 한 조각으로 저녁을 때웠다. 산책길에 올랐다.

날씨가 많이 풀려 아중천변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중천 물길도 훨씬 당당해졌다.

아중천은 가로등 불빛을 따라 흐르다 빛이 끊어지는 곳에서 소양천과 몸을 섞는다. 이곳에서 고산까지 이어진 길은 오로지 어둠뿐이다.

적요를 즐기려면 이곳에 있는 어둠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 어둠 속을 상상의 날개를 펴 날아올라야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길은 허공이 되기도 하고, 어둠은 생각을 잉태한 자궁이 된다. 멀찍할 것도 없이 오늘 하루 생애를 되짚는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날마다 감사할 소재를 찾아 글을 쓰라고 권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쓰려면 리포트 몇 번 쓴 것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마음속 깊이 긍정하는 에너지를 품고 매일 글을 써야 한다. 오늘 하루 생애에서 감사할 일을 검색했다.

심장이 멎지 않고 맥박이 뛰는 것, 혈관에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것이 감사하다. 걸을 수 있는 두다리가 있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손과 젓가락질 할 수 있는 손가락이 있어 감사하다.

빛을 환하게 끌어들일 눈이 있고, 바람에 사각거리는 억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 감사하다. 비 온 뒤 은은하게 피어나는 흙냄새를 불러 모으는 코가 있는 것도.

아침에 눈을 뜨면 갈 곳이 있다. 만날 사람이 있다. 학교에서 거의 매일 학생들을 만난다.

그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아픔을 한두 개씩 매달고 산다. 그들이 앓는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한 이불처럼 덮으려고 애쓴다.

마음이 기울어져 흘러갈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글을 서툴게 쓰는 학생들이 글쓰기 상담을 하러 오면 기쁘다. 천년을 산 것처럼 정겹게 대하는 교수님들이 계셔서 감사하다.

문학 동아리에서 문예지 『어두문학』을 발간하려고 한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원고를 보고 오늘 편집장 학생과 몇 가지를 논의했다.

어두문학회는 각자 쓴 글을 격주에 한 번씩 만나 서로 합평하고 있다. 문학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이 인근에 있어 행복하다. 동아리를 만든 지 4년이 흘렀다. 그동안 세 사람이 문단에 등단했다. 대부분 학생이 글쓰기를 하면서 자신을 치유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때로 섬처럼 떨어져 있어야 감사하다. 이때 자신뿐만 아니라, 우주를 절실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얼마 전 마련한 작업실은 고요 천국이다.

이곳에 있으면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온 것 같다. 오랜만에 찻물을 끓였다. 고요 속에서 보이차 향기가 뭉클하게 번졌다.

산책 끝에 마신 차 맛이 혀끝에 오래 머물렀다 조용하게 물러갔다. 몇 문장 쓰고 나면 늘 자정을 넘기기 예사이다.

야심한 시간에 돌아갈 곳이 있어 감사하다. 귀가하지 않은 가장을 먼저 반겨주는 것은 잠들지 않는 달콩이다. 녀석은 차 소리만 듣고도 날 알아본다.

현관 번호 키 누르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께서 방에서 어김없이 나오셨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시면서 늦게 귀가한 아들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어머니 방 문지방은 유별스럽게 반들반들하게 닳았다. 서재 책상에는 아내가 자리끼를 챙겨두었다. 하루 생애를 행군하면서 생긴 갈증을 풀어주려고.

씻고 누웠다.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텃밭에 자라는 쪽마늘이 혹한 틈에서도 기죽지 않고, 파릇파릇 통마늘 꿈을 꾸고 있다.

쪽마늘 같은 하루의 생이 통마늘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곧 뒷집 김 선생님 네 수탉이 홰를 치며 새벽이 올 것이다.

최재선 한일장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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