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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취의(飽德醉義)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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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취의(飽德醉義) 정신
  • 전민일보
  • 승인 2018.01.0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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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김제에서 어린이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선배 한 분이 서예작품이라며 봉투를 건네주었다. 고맙다 하고 받아 펼쳐보니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였다. 예서로 쓴 근도핵예(根道核藝) 포덕취의(飽德醉義) 여덟 글자였다.

처음으로 접하는 서예작품이라 고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름 있는 집을 찾아가 죽절로 표구를 하여 안방벽에 걸었다. 전주 아파트로 이사 와서는 거실 벽에 걸었다.

드나들며 읽어보고 그 정신에 살려고 몸가짐을 조심했다. ‘도를 근본으로 하고 예를 뿌리로 하며 덕에 배부르고 의에 취하다’는 선비정신을 따르려고 깜냥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정신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농부는 씨를 심어 싹이 나면, 풀을 매고 거름을 주며 벌레를 잡아 가꾼다. 가뭄에는 물도 주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고 한 가지만 잘 못해도 그 작물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가꾸어야 선비정신이 몸에 밴다. 어느 때는 농부보다 훨씬 큰 시련을 겪어야 하기도 한다.

선배는 선비정신으로 살며 후생들을 지도하라는 뜻으로 이 작품을 주었을게다. 군사정권이 권력을 휘두르며 무소불위의 온갖 짓을 할 때라 조심하지 않으면 다쳤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다. 젊은 혈기로 불쑥불쑥 내지르기 쉬운 때라 분기를 안으로 삭이라는 뜻일 게다. 정의감과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참기 어려운 때라 들고 일어나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외치고 싶은 감정이 봇물처럼 고여 있었다. ‘참아라, 참아라, 안으로 삭혀라. 근도핵예 포덕취의하라,’일러 주었다.

작품을 쓰신 강암 송성용 선생은 우리나라의 마지막 선비로 살다 가신 분이다. 평생 한복을 입고 상투에 갓을 쓰고 살았다. 한학을 가학으로 이어왔으며, 선대부터 선비로 살아온 분이다. 그 혹심한 한말의 단발령에도 굴하지 않고 견뎌온 올곧은 선비집안이시다. 고향은 김제시 백산면 요교리다. 이웃면이라 젊은 시절에 족보와 종안보를 발간할 때 방문한 일이 있었다. 시골이지만 석판 인쇄하는 설비가 되어있었다. 근처에는 시서화(詩書畵)에 재능을 가진 석정 이정직 선생의 생가도 있어 선비문화의 고을 같았다. 애국애족은 물론 근검절약하고 제자들을 사랑했으며 자녀교육에도 본을 보인 분이다. 그의 제자들이 전국에 퍼져 있어 그 정신을 잇고 있다.

선생이 이 작품을 쓰시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정좌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먹을 간다. 갈면서 무엇이라 쓸까 곰곰 생각한다. 받을 사람이 교육계에 있다니 선비가 지켜야 할 글귀를 떠올린다. 힘을 주면 먹물이 곱지 않으니 새발의 힘으로 간다. 30여 분을 갈아야 제대로 된 먹물이 된다. 화선지를 펴놓고 붓에 먹물을 찍어 비빈다. 심중에 정한 글귀를 힘차게 내려 쓴다. 그리고 낙관을 찍는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이 지금 거실에 걸려있다. 우리집에서 제일 값나가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고귀하다.

이 작품은 강암 선생의 정신과 혼이 서린 명품이다. 선비의 올곧은 표상이 깃들어 있다. 인륜도덕과 예술을 근본으로 하고 덕에 배부르고 의에 취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포덕취의한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 겉으로 들어 내지 않고 속으로 삭이라는 가르침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했다. 말이 많으면 허튼 소리가 많고 남을 비난하기가 쉽다. 그러나 침묵은 말을 안 해도 그 마음은 곧 헤아리게 만든다. 드러내지 않는 드러냄, 그게 선비정신이다.

작품을 간직한 뒤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 정신을 따라 행하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이룬 것은 없다. 범부에 지나지 않아 마음뿐이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다만 행하려는 의지는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변함은 없다. 내 인품 한 모서리에라도 이 정신이 남아 있다면 다행이리라.

명품을 후세에 길이 전하여 자손이라도 이 정신을 본받아 올곧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도 새해 아침을 맞아 읽어보고 깊은 뜻을 헤아려 본다.

김길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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