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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피던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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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피던 곳에
  • 전민일보
  • 승인 2017.12.28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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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참 스산하다. 겨울이면 더욱 낭만이 깊어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겨울이면 더 움츠리고 더욱 옷깃을 여미는 무미건조한 날이 되어 간다.

올겨울에는‘롱패딩’이라고 말로 불리는 벤치코트가 유행이라고 한다. 겨울의 날씨가 예년에 비해 추워진 탓도 있겠지만, 왠지 겨울의 찬바람에 마음까지 스산해 지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진 까닭도 있을 게다. 참 서글픈 일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강가를 따라 깡마른 나무들이 제 살갗을 내밀고 있는 것이 자꾸 눈에 밟힌다. 계절에 따라 싹이 트고 잎이 피고 또 낙엽이 지는 것이 순리일 텐데, 자꾸만 나무가 헐벗어 자신의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 안쓰러움에 내 마음도 따라 추워지기 일쑤다. 이럴 때면 나도 참 감정 과잉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 이 길. 생각해 보면 이 길을 걸을 때면 유독 외로움이 심해진다. 아마도 이 길이 얼마 전에는 붉은 빛이 지천이던 상사화 꽃길인 탓일 테다. 가녀린 하늘에 대비되어 더욱 선홍빛으로 물들어 보이는 붉은 비늘이 바람에 흩날리던, 그 상사화 꽃길.

누구는 꽃무릇이라 했다. 상사화는 꽃무릇의 속(屬) 이름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상하게 상사화라는 이름이 더 와 닿는다. 상사화라는 말에는 왠지 모를 애절함이 있다. 꽃이 지면 잎이 피어나고, 잎이 지면 꽃이 피어 잎과 꽃이 늘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그 애절함이 비늘같이 얇은 꽃잎에 묻어나는 것이다.

상사화가 가지는 그리움의 정서는 나에게 늘 절절하다. 젊은 날에는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아픔인 상사(相思), 사랑앓이가 나의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그저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충분하던 오래된 청춘의 시절 이야기다. 사랑이 끝나던 그 날, 첫 이별을 하고 돌아서던 이 길에도 상사화는 여전히 붉음이 가득했다.

상사화는 여전히 붉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은 더 이상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래도 상사화 피고 또 지는 계절이 되면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져 온다. 여전히 무언가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지나간 청춘, 지나간 영광, 언젠가부터 희미해져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꿈들. 아마 상사화가 붉던 그 날, 사랑의 아픔에 비틀대던 내 청춘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상사화는 바람에 씨가 흩날려 뿌리를 내리는 꽃이 아니라고 한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물이 한창 불은 강을 따라 상사화의 알뿌리가 흘러 내려오다 물가의 둔치를 만나면 잠시, 또 평평한 평지를 만나도 잠시 쉬어 가려다 제각각 흩어져 제 스스로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는 것이란다.

사람 마음도 그렇다. 내가 원해서 생기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를 마음에 품다 보면 때로는 그 마음이 주체 못하는 물줄기를 따라 나도 모르게 흘러 갈 때도 있고, 또 어느 날에는 둔치를 만나 마음이 잠시 쉬어 갈 때도 있고. 계속해서 흘러가고 싶은데 이미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 더 이상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흘러가던 마음, 기억 어딘가에 자리 잡아 뿌리 내린 마음들에 이 계절이면 자꾸 마음을 들쑤시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도 쓰지도 못할 노트 한 권 들고, 허한 마음으로 상사화 피던 그 강가를 걷는다. 이미 상사화는 다 지고 밑동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는 그 길을. 나는 무엇이 그렇게 그리운 걸까.

김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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