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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최후의 꽁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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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최후의 꽁초’
  • 전민일보
  • 승인 2017.12.19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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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7월 9일 아침 나는 마루에서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다 귀뺨을 얻어 맞았다.

그 날은 내가 군에 입대하는 날이었고 나의 볼에 불이 번쩍 나게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아버지였다. 이쯤 되면 군 입대 기념으로 귀뺨을 날릴 부모는 없을 터이고 내가 그만한 잘못을 했거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을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특별한 통과의례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군 입대가 몇 년 늦었던 나는 당원들과 전주 경원동 모 막걸리 집에서 살풀이를 시작했다. 소위 송별식이다.

우리는 당시 유행했던 최백호의 <입영전야>, “아쉬운 밤~ 흐뭇한 밤~뽀얀 담배연기. 자아~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우리의 단결을, 우리의 의리를, 나라 발전을 외치며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하는 애국청년 ‘애주당(愛酒黨)’의 모임을 ‘성스런 의식’으로 승화시키며 무려 3박4일을 이어갔다.

새벽에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입대 날이었다. 부랴부랴 목욕탕에 가서 까까머리를 하고 집에 들어가 삼일밤낮을 기다린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올렸다.

그동안 울 엄마는 막내아들 몸보신 시켜 보낸다고 삼계탕을 끓여놓고 기다리며 재탕 삼탕을 반복하다 삼계조림이 되어버렸고, 특별한 연락수단이 없던 때라 전날까지 소식이 없자 ‘입영기피’아님 ‘실종’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 신고라도 할참이었단다.

그러니 그때야 나타난 아들이 반갑다 못해 얄미웠을 것이다. 아버지의 귀뺨은 ‘조건반사’로 반가움의 귀뺨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서둘러 얘기를 하셨다. “네가 군에 가서 공교롭게 전쟁이 나서 죽을 수도 있다. 또 훈련받다 다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지켜라, 담배는 피우지 마라”

나는 논산행 군용열차 안에서 빨간모자의 명령에 따라 머리를 의자 밑에 박고 그가 하사품처럼 나눠준 건빵을 입에 문채, 결론적으로 ‘죽어도 좋은데 담배는 태우지 말라’라는 아버지의 ‘화두’를 되새김해보았다. ‘아들 목숨보다 담배가 더 중요한가?’, 눈을 뜬 채로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건빵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리 미워도 내가 아들인데 아버지라면 ‘담배는 피워도 좋으니 살아서 돌아오라’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결국 건빵하나도 입에 넘기지 못하고 논산훈련소 1290만 번째의 훈련생이 되었다. 화두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결심을 했다.

‘좋다, 죽어도 담배는 피우지 않겠다’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 아니고 내가 죽으면 결국 아버지가 후회하게 될테니까...

참 지금 생각해도 단순하고 어처구니없는 반항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하루 한 갑 정도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3갑 이상을 피우시던 아버지는 내가 담배를 피울 거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애송이는 감지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1979년 7월 9일부터 담배를 끊었다.

이후 전방부대에 자대배치를 받고 얼마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는 10.26이 터졌고, 12.12, 광주 5.18사태 등 데프콘(전투준비태세)상태에서 숨 가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우리사단장이었으니 그 긴박감은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10.26 다음날 본부대장이 “각자 편지(유서)를 써놓아도 좋다”고 말했을 때, 이렇게 전쟁이 나서 죽을 바에는 ‘아버지 얘기 안 듣고 담배나 피울걸...’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그 와중에 아들이 걱정되었던지 부모님이 1980년 1월27일에 면회를 오셨다.

나는 타이어 타는 속도로 면회장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광속으로 날아오는 나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PX 문을 박차고 들어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나에게 “자, 한대 피워라”하며 불붙인 담배 한 개피를 건넸다.

나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 아버지가 죽어도 담배는 피우지 말라면서요”, “그래서, 정말 끊었어?”, “그럼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뒤로 돌아서서 그 담배를 몇 번인가 깊게 빨아들이고 불을 끈 다음 양복주머니에 넣었다.

세월은 흘러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0년 1월 아버지는 지병과 노환으로 80세를 일기로 하직하셨다.

장례 후 나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깜작 놀랐다. 눈에 익숙한 태양(SUN)이라는 담뱃갑에 꽁초가 하나 묶여 있는데 그 옆에 <80.1.27. ‘최후(最後)의 꽁초’>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나는 숨이 멎었다. ‘그렇다면 저 꽁초는 그때... 그러니까 80년 면회 왔을 때 피웠던 당시 그 담배꽁초란 말인가...’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 졌다.

귀뺨을 날리며 ‘죽어도 좋은데 담배는 피우지 마라’라며 군에 보낸 아들의 면회를 왔다가,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당신 나이 60세, 40년을 넘게 피우던 담배를 아버지도 그날 당장 끊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군대 생각만하면 아버지에게 맞은 게 서운하다고 원망을 했었다.

미련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데 20년이나 걸렸다. 내 나이 마흔셋에 말이다.

그로부터 다시 17년이 지난 오늘, 우리생활관 아이들의 금연교육차 찾아온 원광대학교 전북금연지원센터 선생님들을 보자 문득 그때 아버지의 일이 떠올랐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워 마음이 시려오는 겨울이다.

이혜성 전북청소년자립생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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