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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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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꿈
  • 전민일보
  • 승인 2017.12.08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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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敗者)는 말이 없다. 우리 역사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망한 나라의 문화는 깡그리 없어졌다. 나당에 패망한 백제문화가 그렇고, 신라에 망한 가야문화가 말해준다. 어쩌면 그렇게도 야무지게 없애버렸을까. 대가야의 문화는 임금의 이름도 세 왕밖에 전하지 않는다.

대가야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510년이나 이어온 역사 깊은 나라였다. 그랬어도 금관가야만 기억하지 나머지 5가야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대가야는 건국신화도 전한다. 건국신화는 대부분 천손강림형(天孫降臨型)이다. 가야산의 산신인 여신 정견모주가 하늘의 신인 이비가지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뇌질주일이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다.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가 되고 뇌질청예는 김수로왕으로 가락국의 시조가 되었다. 대가야는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군조에도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말왕 도설지왕까지 16왕 510년간 이어졌다고 실려 있다. 참 오래 이어온 고대왕국이었다. 고려나 조선과 맞먹는 역사가 긴 나라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체도 모르고 잠깐 나타났다 없어진 나라로 여긴다. 나도 그랬다.

처음의 가야는 김해중심의 금관가야가 종주국이 되어 가야연맹을 이끌었다. 다른 가야는 함안의 아라가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등이 낙동강 가에서 작은 땅을 차지하고 세력을 유지했다. 대가야만이 전라도까지 세력을 넓혔다. 금관가야가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된 뒤에는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가 되었다. 고분에서 나오는 유물을 보아도 초기에는 김해의 고분에서 많은 유물이 나오나 후기에는 없고, 대신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에서 많은 매장유물이 나왔다. 이것으로 보아 5세기 중엽부터는 대가야의 세력이 더 강했을 것 같다. 한창 번성했을 때는 전북의 임실, 순창, 무주, 장수, 남원으로부터 전남의 순천, 여수, 고흥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고 근래 고고학 발굴에서 나타난 출토유물을 보고 추정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문헌에 기록이 되어있거나 출토유물을 보고 확증하는 것이다. 그 출토유물도 교류에 의하여 옮겨온 것인지 오랜 생활에서 번진 것인지를 살핀다. 한 지역에서 유물이 나오려면 짧은 기간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문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유물로 남는다. 이런 것으로 보아 대가야의 유물이 출토된 전북지역은 적어도 몇 십 년 동안은 대가야의 세력이 들어와 유지 되었다는 증거다.

대가야는 국제외교에도 능했다. 왜와는 교류가 많았다. 철기문화가 앞서서 왜에 전해주었다. 중국 남제에 들어가 복구장군 본국왕의 작호를 받기도 했다. 신라와는, 9대 이뇌왕이 결혼동맹을 맺어 왕녀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왕비로 맞기도 했다. 따라온 시종이 100여 명이라 각 지방에 보내 살게 했으나 그들이 가야복장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쫓겨나는 상황이 벌어지니 신라가 결혼동맹을 폐기하였다.

철기문화의 발달로 생활용품은 물론 갑옷과 창, 칼 등 무기를 철로 만들어 썼다. 이웃 야로면의 이름은 철을 생산하는 가마에서 생겼다. 7대왕으로 추정하는 가실왕은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을 만들었다. 곡을 지어 연주하도록 하여 12곡을 지었다하나 이름만 전해오고 전해지지 않는다. 나중에 우륵은 신라로 망명하여 신라 음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일찍이 철을 생산하여 강국을 이루고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진흥왕 때 이사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대가야의 꿈이 짚불처럼 사그라졌다. 오직 땅속에 묻혀있는 유물만이 옛날의 번성을 말해주고 있다. 고분의 유물이 아니었으면 대가야의 문화는 영영 사라질 뻔 했다.

아쉽다. 대가야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겨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기록이 남아 있다면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꺼내지도 못했을 게다. 어떻게 뒤떨어진 나라가 철기문화가 앞선 대가야를 누르고 세력을 뻗칠 수 있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증거도 없이 해댄다.

이번 여행에서 대가야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 아쉬움이 남았다. 학자들이 더 연구하여 장기리 암각화 등 아직 의미를 모르는 부분을 밝혀주었으면 한다. 패자는 말이 없어도 유물은 가야인들의 문화를 소리 없이 말해주지 않는가. 지산동 고분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길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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