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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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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 전민일보
  • 승인 2017.12.07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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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 깊이 박힌 감기가 한 달째 칩거하고 있다. 병원에 들러 영양주사를 맞으며 달래보고 병원과 약국을 오가며 약을 지어 먹고 생강과 대추 달인물을 마시며 구슬렸지만 허사였다. 녀석은 나 혼자 굴복시킨 것으로 성에 안 찼던지 작은아들과 어머니한테까지 기세등등하게 힘을 뻗쳤다.

작은아들은 약을 몇 번 먹더니 기침과 가래가 잦아들었지만, 어머니는 김장을 며칠 하셔서 그랬는지 감기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 집 김장을 적잖게 하신 데다 김장할 때 도와준 교우나 이웃집 김장품앗이를 하느라 며칠 고생하셨다. 어머니 목소리가 푹 내려앉고 코가 맹맹하게 막혀 병원에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한사코 병원 가는 것을 마다하시며 약국에서 약을 지어오라 하셨다.

약국에서 지은 약을 사흘 드셨는데도 나아지기는 커녕 기침이 더 심해지고 아예 킁킁 앓으셨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가는 길에 아버지를 전주역에 모셔다드려야 했다.

순천으로 문상을 가셔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은아들 안약이 떨어져 안과에도 들러야 했다.

오후 1시 20분부터 학교 강의가 있고 4시부터 몇몇 학생과 글쓰기 상담을 하기로 약속하여 오전에 일을 다봐야 했다.

먼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다드렸다. 월요일인 데다 요즘 감기를 앓는 사람이 많아 대기실이 사람들로 촘촘하였다.

간호사에게 어머니 상태를 설명해주고 아버지를 모시고 전주역으로 갔다. 마음이 바쁘면 신호등도 발목을 붙잡으며 험한 산봉우리가 된다.

이런 날은 때를 맞추기라도 하듯이 네 바퀴 달린 것이 한꺼번에 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앞길을 가로막는 훼방꾼 같았다.

전주역에 이르자 사람과 차가 한데 엉켜 소음이 잡초처럼 무성하였다. 철로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도착하는 종착역은 고향일 수 있고 거래처일 수 있고 여행지일 수 있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동서남북 어딘가와 팔방이겠지만, 누구나 겨울과 마주칠 것이다.

겨울만 되면 열차를 타고 떠돌아다니고 싶은 역마살 기가 도진다. 십여년 전, 열차에서 맞은 정동진 아침 해는 단순한 일출이 아니라, 묶였던 숨통이 트인 것과 같은 호흡이었다.

안과에 들렀다. 어머니 병원까지 가려면, 공시적인 시간에 붙잡혀 추억을 한가하게 들추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겨를 없었다.

오늘따라 안과가 마치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였다. 차가 많이 다니는 사거리에 있어 주차하는 것부터 인내할 것을 주문한다.

주차장이 없고 인근에 대형 마트가 두 군데 있어 차를 대려면 기다림과 민첩성의 날개를 달고 스스로 평형감각을 잘 조율해야 한다.

용케 주차할 자리가 생겼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찾은 것 같은 안도감이 벅차게 몰려왔다. 안과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뙈기 텃밭에 상추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자란 것처럼 사람 천지였다. 간호사에게 아들 약을 타러 왔다고 나직하게 말을 건네며 애절한 눈빛으로 눈을 맞췄다.

대여섯 사람이 진료실에서 나온 뒤 간호사가 아들 이름을 불렀다. 약국에 들러 약을 탄 다음 어머니 병원으로 향했다.

나신으로 서 있는 가로수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바람결대로 흔들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이했던가?

바람 앞에서 무참하게 부서지고 쪼개져 날린 적이 있었다. 바람을 회피하려고 달아났지만, 몇 발짝 도망치기도 전에 붙잡혀 혼나기도 했다. 하룻날도 태풍주의보를 발령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나는 바람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모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했지만, 나를 키운 것 구 할이 바람이었다. 바람을 막으려고 하면 찢어지거나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바람이 부는 결대로 따라 흔들렸다.

어머니를 병원에서 모시고 나와 집에 당도했다. 묵방산에서 거침없는 속력으로 내려온 바람 앞에 모든 나뭇가지가 완곡한 곡선으로 몸을 휘었다. 감나무는 몸이 통째 흔들리면서도 우듬지에 있는 까치밥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온몸이 비늘투성이인 화살나무는 제 몸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라도 입힐까 봐 언행을 얌전히 하고 있었다. 요런 날, 바람 앞에서 쓸데없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몸이 두 개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무리 까치 떼가 묵방산으로 눈부시게 날았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미리 싸주신 도시락을 챙겨 학교로 서둘러 향했다. 내 몸 어딘가가 가렵기 시작하면서 나이테 한 줄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후유”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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