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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순례길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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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순례길 가는 길
  • 전민일보
  • 승인 2017.10.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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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鄕里)에 있는 고옥(古屋)을 철거하고 그 터에 다시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고옥은 고조부(高祖父)께서 100여년 전에 지으셨고 4대가 고고성(呱呱聲)을 울린 터전이었다.

새로 지은 집은 아침이면 동쪽 창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해가 떠오르고 저녁 무렵이면 서쪽 창에서 해가 지면서 감나무 사이로 아름다운 석양을 연출해준다.

뜰에 내려서면 익산천 제방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제방에는 플라타너스과에 속하는 양버즘나무 한 그루가 너른 들녘을 내려다보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자태로 서있다.

양버즘나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심어진 듯 한데 수령을 짐작할 수가 없다. 휴일의 이른 아침, 양버즘나무가 서있는 제방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제방에 올라서니 아름드리 노거수가 된 나무는 반백년 만에 고향 터로 귀향한 나를 맞아주었다.

우람한 나무의 넉넉한 가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조부께서 손녀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듯 했다.

할아버지는 익산천(益山川) 제방으로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뜯게 하셨는데 다섯 살 난 손녀였던 나는 할아버지 뒤를 따라 제방에 오르곤 했었다.

제방에 오르면 항상 시냇물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탁류가 흐르는 개천의 형상이지만 예전에는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햇빛이 비치고 양버즘나무 이파리에도 햇빛이 비쳐 금빛과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던 영상이 기억 속에 오로라처럼 확연히 빛나고 있다.

조부님을 따라나섰던 옛 추억의 발자국과 맑은 시냇물의 기억에 잠시 머무르다가 양버즘나무아래 벤치에 앉아 보았다.

벤치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시야에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표가 들어오고 이정표에는 미륵사지에서 출발하여 초남이 성지에 이르는 순례길 제5코스라고 적혀있다.

옥룡천(玉龍川)과 부상천(扶桑川)이 합류되어 흐르는 익산천변 동쪽 마을, 학이 날아들던 연못이 있던 마을의 제방길이 지금은 아름다운 순례길 5코스의 한 구간으로 변모해있었다.

이 제방길이 왕궁리 5층석탑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 출발하는 순례길 5코스의 한 구간임을 생각해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양버즘나무아래 벤치에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경건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백제의 옛 도읍지임을 증빙하는 유물의 하나인 사리장엄이 발굴된 미륵사지와 연결된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옥룡교(玉龍橋)에서 출발하여 순례길 5-24와 5-25 구간을 지나 입석교(立石橋)에서 회귀하여 연지(蓮池)가 있는 논두렁으로 내려왔다.

논두렁을 걷다가 달팽이 한 마리가 풀줄기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순례길의 표지석에는 달팽이가 그려져 있다.

순례길 표지석의 그림과 똑같은 달팽이가 마치 또 하나의 순례길 이정표처럼 풀줄기에 제법 높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태양의 고도가 높아져 햇살이 등 뒤에서 빛나기 시작하여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이 만들어 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표를 바라보며 달팽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면서 1800년대로 돌아가 부모님이 병환이 있으실 제, 시탕(侍湯),상분(嘗糞)의 효(孝)를 실천하셨다는 나의 고조부님을 추모하고 버드나무 아래 학이 날아들었다는 연못을 찾아 미음완보(微吟緩步)하였다. 상분(嘗糞)이란 부모의 병세를 살피려고 그 대변을 맛본다는 말인데, 선친이 생존하실 때 고조부님의 제사를 모실 때 들려주신 효행담이었다. 족보를 펼쳐보니 그 행장이 기록되어 있다.

단기(檀紀) 4181년 헌종(憲宗) 기유구월24일생(己酉九月二十四日生)이며 어버이 섬기기에 지극히 효(孝)하야욕식지물(欲食之物)은 즉시 공진(供進)하고 병이 있는 즉 시탕상분(侍湯嘗糞)하였다.(단기 4181년 헌종임금, 기유년 구월 24일에 태어났으며 어버이 섬기기에 지극히 효성이 깊어 드시고자 하는 음식은 즉시 상에 올리고 병환이 생기면 즉시 탕약을 끓이고 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단하였다.)

조상님들의 제사를 모실 때 축문을 낭독하시던 선친의 음성이 문득 귓전에 또렷이 들려왔다. 유세차~ 전헌상향(維歲次~典憲尙饗) 나는 선친의 음성을 따라 나직히 축문을 암송하며 조상님들을 추모하였다.

그리고 다시 1400여년전의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익산에 천도(遷都)를 하고 미륵사를 건립한 무왕과 선화왕후, 미륵사지 서탑에 국태민안을 발원하는 사리봉안기를 남긴 사택적덕왕후의 자취를 찾는 고도(古都)의 순례자가 되어 백제왕국에 입성(入城)하는 상상에 젖어들었다.

마침내 이 순례길의 상고(詳考)에서 얻은 효(孝)와 충(忠)의 마음이 나의 후손들에게 길이 유전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양버즘나무의 우듬지에 높이 매달고 귀가하였다.

소현숙 전북도 여약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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