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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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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7.09.19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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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살던 옛날이 그립다. 비록 지금은 도시에서 넉넉하게 잘 살지만 가난하던 옛날로 돌아가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때로 달려가고 싶다. 가난했지만 추억의 앨범을 펼쳐 보면 그때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또래친구들이랑 어울려 여름이면 먼 냇물까지 가서 물장구치며 놀던 일도 그립고, 겨울이면 동네 앞 얼어붙은 무논에서 손수 만든 스케이트를 타던 즐거움도 잊히지 않는다.

봄이면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 벚꽃 등, 봄꽃을 찾아 산과 들을 누비며 뛰놀던 일도, 가을이면 뒷동산인 쌀산[米山]에 올라 아름다운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꽂고, 도토리와 알밤을 줍던 추억도 되새겨진다. 그 쌀산을 우리는 그냥 ‘싹산’이라고 불렀었다.

시골에는 골목길이 많아서 좋았다. 윗마을, 아랫마을, 새터마을, 어느 동네에 가더라도 골목길은 있었다. 집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길은 모두 골목길이었다.

그 골목길은 우리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배움터요, 사교장이었다. 그 골목길에서 만나면 우리 개구쟁이들은 땅따먹기와 팽이치기, 딱지치기, 탄피따먹기, 자치기, 못 치기, 등의 놀이를 하고, 술래잡기와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어둑어둑할 때까지 놀이에 빠지면 밥 먹으라는 카랑카랑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 우리 개구쟁이들은 내일 만나자며 아쉽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았다.

우리는 골목길에서 놀이를 하며 창의력과 규칙을 배웠고, 우정의 탑을 쌓았다.

골목길을 지나다니는 마을 어르신들은 모두가 선생님이셨다.

아이들이 놀다가 다투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그 어르신들이 꾸짖고 타이르며 바로잡아 주셨다. 저녁밥을 먹고 호롱불을 켠 채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고서 꾸벅꾸벅 졸다가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했었다.

전화기가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어도 불편하거나 심심한 줄 몰랐다.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게 사셨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읽을 책도 드물었다.

동화책이나 동시집이나 이야기책도 없었다. 책이라면 학교에서 나누어준 교과서가 전부였다.

골목길은 소문을 주고받는 정보의 산실이고, 지식의 교류장이었다.

선배나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온 아이들이 새 소식을 알려주고, 어쩌다 찾아온 도시의 손님들이 물고 온 세상정보를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때는 골목길이 없었더라면 귀를 닫고 깜깜하게 살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골목길은 군것질감을 나누어 먹는 인정의 교류장이었다.

앵두, 밤, 감, 같은 과일이나 한과, 엿, 떡 같은 음식 그리고 운이 좋은 날엔 사탕이나 과자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꼬마친구들은 너도 나도 가진 것을 나누어 먹으며 정이 깊어졌다.

옛날의 골목길을 ‘골목길학교’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골목길학교에서는 동네 어르신들 모두가 훌륭한 무보수 훈육선생님이셨다. 아버지가 아니 계신 아이들도 그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시골을 떠나 전주라는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시에도 골목길은 있었다. 수레가 드나들 수 없는 좁은 골목 안에 있는 집은 집값이 싸다고 했었다.

도시의 골목길은 시골의 골목길과 달랐다. 도시의 골목길은 정이 메마른 보행로였을 뿐이다.

또래 어린이들이 어울려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놀이를 하며 정을 쌓는 놀이마당이 아니었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쉼터도 아니었다. 어른을 보아도 허리를 꺾고 꾸벅 인사를 드리는 배움터가 아니었다.

낯선 이방인들이 필요에 따라 지나다니는 길일 뿐 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오가며 목례조차 나누지 않는 게 도시의 골목길이었다. 도시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은 시골 골목길에서 만난 선생님이 아니었다.

도시가 자꾸 팽창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도시의 골목길은 자꾸 줄어들었다.

어느 곳을 가던지 도시의 길은 자꾸 넓어졌다.

도시의 골목길에는 전봇대가 많아서 숨바꼭질하기에 좋지만 그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도시 골목길에서는 집집마다 대문을 꼭꼭 잠그고 살아서 그런지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다.

아니 도시의 아이들은 학원가기에 바빠 골목길에서 어울려 놀 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고향에 가보면 요즘 시골의 골목길도 찬바람만 씽씽 지나다닐 뿐 아이들의 발자국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요즘 골목길에서는 소똥조차도 구경할 수 없다.

집집마다 소를 기르지 않고 떨어진 곳에서 소들을 집단 사육하기 때문이다. 농촌에 빈집이 불어나서 그러는지 무리지어 놀 수 있는 아이들도 드물다.

내가 다닐 때 전교생이 8백여 명이던 초등학교가 요즘엔 전체 재학생이 40여 명도 되지 않는다.

시골의 좁은 골목길이 넓어지고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되었지만 뛰어놀 아이들이 없어서 쓸쓸하다.

시골로 돌아가는 도시인들이 얼마나 더 불어나야 우리네 농촌이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옛날처럼 골목길에서 어린이들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뛰노는 옛날 같은 시골이 될 수는 없을까?

김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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