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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석 전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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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석 전야제
  • 전민일보
  • 승인 2017.09.01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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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견우직녀가 오작교를 건너 일 년에 단 한번 만나는 날인 칠월 칠석(七夕)입니다." 마루에 놓인 라디오에서 오후 5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초저녁 무렵의 마당에는 진분홍의 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장마가 지난 후 이글 이글 타오르는 열기로 조금만 움직여도 땀방울을 뚝뚝 흘리게 했던 태양의 위세가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여름이 다해가고 있는 때였다. 조석으론 날씨가 제법 서늘해졌고 그 여름을 갈무리하려는 듯 분꽃은 까만 씨앗을 맺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 다녀와서 숙제를 마치고 분꽃이 피어있는 마당의 꽃밭으로 내려갔다. 까맣게 익은 분꽃의 씨앗을 한 줌 따서 돌에 찧어 가루를 낸 다음 부드럽고 매끄러운 분가루를 손등에 발라보는 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문득 시들시들해진 꽃나무의 이파리들을 바라보며 꽃밭에 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부어 꽃나무에 물을 뿌리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일일 라디오 동화 ‘정글 소년 모글리’가 시작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제 호랑이 시어칸에게 쫓기고 있었는데......그러다가 앞서 뉴스에서 내일이 칠월 칠석이라는 아나운서의 말에 나는 물뿌리개를 꽃밭 앞에 던져두고 어머니가 계신 부엌으로 달려갔다.

"엄마! 낼이 칠월 칠석이래"

칠월 칠석이라는 말에 엄마는 나보다 더 놀라시는 듯 했다. 엄마는 부랴부랴 장바구니를 챙겨 시장에 다녀오셨다. 시장에 다녀오신 엄마의 장바구니엔 달콤한 냄새가 나는 복숭아와 참외, 백숙용 생닭이 담겨있었다. 저녁 밥상은 먹음직스러운 닭백숙과 닭죽으로 차려졌다. 고소한 닭죽을 배불리 먹은 후 우물 속에 시원하게 담가두었던 참외를 두레박으로 건져 올려 껍질을 깎아 접시에 가득 담아주셨다. 참외는 아삭아삭 시원했고 껍질을 벗겨 먹는 수밀도는 단물이 뚝뚝 떨어지며 달콤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늦은 시간에도 팥을 삶고 찹쌀을 불려 방앗간에 가서 빻아다가 내가 좋아하는 팥 시루떡을 만들어주셨다.

“많이 먹어라, 올해는 윤달이 들어서 그만 깜빡 잊었구나, 엊그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벌써 열두 살이 되었네.”

엄마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한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려주셨다. 엄마의 이마뿐만 아니고 엄마의 옥색 블라우스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엄마의 땀 냄새와 분냄새가 기분 좋게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칠월 칠석의 하루 전날인 음력 칠월 초엿새 날은 바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다. 엄마는 우리 육남매와 시누이 시동생 등 모두 열 명이 넘는 대식구를 뒷바라지하는 바쁜 일상에 파묻혀 어린 딸의 생일을 잊고 계셨던 것이었다. 여고에 다니는 고모 둘과 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삼촌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던 때였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비롯하여 우리 육남매와 고모 삼촌들의 도시락을 챙기고 아침밥을 차려 학교에 보낸 후 대식구가 벗어놓은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하고 먹거리를 챙기는 일로 밤늦게까지 쉴 틈이 없으셨다. 그 날 저녁 무렵에야 내 생일임을 아시고 늦게나마 조촐한 생일상을 차려주신 것이었다. 그 해 12살 생일이후로 나는 내 생일을 자칭 칠석전야제(七夕前夜祭)로 부르기 시작했다. 칠월 초엿새 날은 칠석 전야의 날이기 때문이었다.

2009년 8월 25일 칠석전야의 오후 5시, 그 해의 칠석전야제 행사는 국가적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첫 우주 발사체인 나로호 발사카운트 다운을 하면서 각자의 소원을 함께 띄워 보내는 이벤트행사도 벌이고 있었다. 나의 소원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전해드리는 것이다. 나로호는 드디어 우주를 향하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 음속을 돌파하고 대기권을 뚫고 궤도에 안착하여 우주를 운행하면서 우주의 이치와 또한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나로호가 목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더 높은 고도에서 분리되어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우주 미아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나라의 과학 발전에는 좀 애석하고 서운한 일이지만 나로호는 칠석전야에 하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계신 하늘로 날아갔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그리움과 또한 모든 이들이 지니고 있는 간절한 그리움을 싣고 나로호는 궤도를 벗어나 디지털 오작교가 되어 더욱 높은 고도로 날아간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2013년에 나로호는 드디어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목표 궤도를 돌며 우주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올해는 윤달이 들어 처서가 지난 초가을밤에 칠석전야가 있었다. 나는 조촐하게나마 칠석 전야제를 치르고 마음속에 간직된 오작교를 건너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뵈었다. 어머니는 닭죽을 호호 불며 드셨고, 나는 말랑말랑한 수밀도의 껍질을 손으로 벗겨 어머니의 입에 넣어드렸다. 초가을밤은 깊어갔고 수밀도와 분꽃냄새가 달콤하게 어우러진 젊은 엄마의 향기에 취하여 꽃잠에 든 칠석 전야제였다.

소현숙 전북도여약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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