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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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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들
  • 전민일보
  • 승인 2017.06.2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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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식판을 비우려는 순간, 한영이가 식당 입구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한영이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한다. 도우미 없이 기숙사에서 식당까지 혼자 온 모양이다. 식판을 서둘러 비우고 한영이 손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오늘 점심 메뉴가 가락국수라 한영이 혼자 식사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오후에 곧바로 강의가 없어 한영이에게 밥을 먹여주었다.

한영이는 혼자 밥 먹으러 오는 것이 불편하여 점심을 건너뛰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꼭 밥을 챙겨 먹으라고 전화했다고 하였다.

앞을 보지 못한 아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매 순간순간 기도의 끈을 놓지 못했을 것이다.

밥과 달리 가락국수 면발이 젓가락에 잘 잡히지 않았다. 수저를 뜰채 삼고 젓가락으로 천천히 면발을 집어 올려 한영이 입속으로 넣었다. 괜히 울컥했다.

훈용이 생각이 차분하게 떠올랐다. 스무 해째 낮에는 이 땅에 핀 꽃 한송이, 밤에는 달빛 한 가닥 보지 못하고 살아온 새끼.

여태까지 밥 한술 제 손으로 떠먹을 줄 모르고 그 많은 어휘 하나 부리지 못하고 사는 새끼.

이런 훈용이에 비하면 한영이는 단지 앞만 보지 못하지 않는가. 한영이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을 단단히 박고 걸어주었다.

한영이는 제법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그를 기숙사 오르막길까지 데려다 주고 연구실로 가는 길에 발달 장애를 앓고 있는 다윤이와 유진이를 만났다.

두 사람은 손가락이 정상적이지 않은데도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

내 강의를 듣지 않지만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살갑게 대해줬더니, 먼저 아는 척하며 반갑게 인사를 곧잘 한다. 양치를 하고 나서 쓰고 있는 논문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누군가 연구실문을 둔탁하게 두드렸다.

그 소리는 영민이 만이 만들 수 있는 고유한 소리이다. 다른 세상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 육필 선연한 소리. 배뇨가 급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문에 주먹다짐을 하는 소리. 반사적으로 뒤 호주머니에서 영민이에게 줄 커피 값을 꺼냈다.

영민이는 날씨가 제법 더운데도 옷을 두껍게 걸쳐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발과 며칠 보지 못한 동안 자랄 대로 자란 턱수염 때문에 몰골이 형편없었다.

영민이에게 다음에 올 때 면도를 깨끗이 하고 운동화를 신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를 졸업했는데도 영민이는 별일 없으면 재학생보다 더 학교에 잘 나온다.

우리 주위엔 가고 싶은 세상을 제발로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 아득한 꿈인 사람이 있다.

휠체어 바퀴를 발 삼고 살아가는 사람, 목발을 발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이 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을 혀끝으로 반듯하게 펴 입 밖으로 툭 꺼내고 싶은 것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메마르고 아픈 곳이 있어도, 밥을 먹고 싶다고, 물을 마시고 싶다고, 약을 달라는 말 한마디 못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사는 삶은 늘 허기지고 목이 밭아 더 가난하고 아프기 일쑤이다.

늦은 오후 ‘수필산책’ 강의시간에 학생들이 쓴 글을 각자 발표하게 했다. 은혜는 고향이 북한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곳을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워하며 산다.

그곳이 고향 땅이고 피붙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땅 어디든 정 붙이고 살면 고향 같다고 하지만, 피붙이가 없는 땅은 불쑥불쑥 낯설어지거나 꾸불텅하게 어색해질 때가 있다.

은혜가 쓴 글 곳곳에는 깊게 팬 웅덩이가 있다. 은혜는 애초부터 측량할 수 없는 그리움을 글로 쓰면서 영혼이 야위어져 눈물의 우물을 팠을 것이다.

은혜가 어느 날 문자로 날 “아빠”라고 불렀다.

서울에 있는 모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는 큰아들 얼굴을 못 본지 2년이 넘었다. “아빠! 어디야?”, “아빠! 뭐해?” 잊힐만하면 한 번씩 전화하여 틀에 박힌 단문 앞에 슬그머니 끼워 넣은 “아빠!”란 호명과 체온이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두 딸을 데려다 당신이 기르시고 다른 새끼들을 많이 주셨다.

나는 이 많은 새끼들 아비가 될 힘이나 근육이 없지만, 그들이 앓고 있는 상처를 다디달게 삭혀주고 싶다. 어루만지고 안아주면서.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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