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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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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민이
  • 전민일보
  • 승인 2017.05.11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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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언제 밥 한 번 사 주세요.”

영민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영민이는 지적발달 장애를 앓고 있다. 오래전 모 학부를 졸업했지만, 재학생들보다 학교를 더 잘 나온다.

가끔 페이스북에 취업이 안 돼서 힘들어 죽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오늘도 영민이가 내가 강의하는 강의실 앞에서 인사를 했다. 나는 영민이를 만날 때마다 커피값 정도를 준다.

강의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 연구실 문을 누군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영민이었다.

취업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옷을 지저분하게 입은 영민이에게 옷부터 깨끗하게 입고 다니라고 했다. 그리고 수염을 깎고 양치질을 잘하라고 했다. 취업하려면 취업준비를 열심히 해야지 가방만 메고 왔다 갔다 하면 취업할 수 없다고 했다.

영민이는 내가 지적한 것을 잘 실행하는 편이다. 옷을 깨끗하게 갈아입었다고 자랑하러 오기도 하고 수염을 깎았다고 보여주러 오기도 한다.

가끔 헷갈리는 시간표와 강의실을 영민이는 나보다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강의 중간에 쉬는 시간을 용케 맞춰 강의실로 곧잘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영민이가 싫지 않고 기특하다.

혹자는 영민이가 커피값을 받으러 날 만나러 온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영민이가 나에게 밥을 사달라고 하고 강의실이나 연구실로 시간을 맞춰 찾아온 것은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다.

커피값을 받으려고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이 그립기 때문이다. 사람 냄새가 맡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영민이는 대학을 졸업하면 으레 취업이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양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고 환영해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음식을 먹다 옷에다 흘리고 양치를 잘 하지 않은 자신을 이 사회가 품어주고 감싸주리라고 희망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면 자판기처럼 커피를 내어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나도 영민이에게 가끔 세상 사람이 었고 이 사회였고 어느 누군가였다. 난 평소 지갑을 옷에 넣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 차에 두고 다닌다. 영민이를 만나면 주려고 바지 호주머니에 잔돈을 미리 준비하지만, 허둥지둥 살다보면 잊어버릴 때가 있다.

이런 날 영민이를 만나면 난감해진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빌려달라고 해서 주지만, 외나무다리에서 단둘이 마주치면 미안하다고 미리 말한다.

이런 날 영민이 표정은 매우 흐릿하다. 표정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아마 믿는 도끼에 발등 찧은 기분일 것이다. 그 순간 내 마음 역시 불편하지만, 내 일에 몰두하느라 영민이 감정을 기억 밖으로 금방 내놓고 만다.

장애를 앓는 아들을 둔 아비로서 장애를 앓는 사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입에 침 바른 소리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요 며칠 영민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내가 영민이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학교 식당으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모 학과 여학생 둘을 만났다. 점심먹으러 가느냐고 했더니 집에 간다고 했다.

지나가는 말로 밥을 사주겠다고 하자 “정말이세요?”라고 되물었다. 밥값이 없어 집으로 가서 먹으려고 했던 참이었다고 했다.

두 학생은 밥이 꿀맛 같다며 다디달게 먹었다. 그리고 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가겠다고 했다.

“선생님! 언제 밥 한 번 사 주세요.” 영민이가 있을지 몰라 식당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금요일 점심 학교식당은 다른 날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고 영민이도 보이지 않았다. 목감기 때문에 입맛이 달아나 밥 먹는 것도 귀찮던 참이었다.

그런데 두 여학생이 맛있게 밥 먹는 모습을 찬 삼아 모처럼 점심을 찰지게 먹었다.

누군가에게 밥을 사준다고 하거나 밥을 사달라고 한 것은 사람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움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밥을 먹자고 그런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밥을 먹자고 그럴 때는 ‘언제’라 하지 말고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을 내밀어야 한다.

다만, 영민이가 나에게 ‘언제’라고 한 것은 자신은 언제든지 좋으니 내가 시간 있을 때 만나고 싶다는 배려였을 것이다.

나 역시 영민이처럼 “언제 밥 한 번 사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있다. 봄은 더디게 온 듯 만 듯 왔다가 잽싸게 도망치듯 달아나버린다.

겨울엔 첫눈 내리면 말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봄이 왔고 봄이 되면 청명한 날 말해야지 하고 미루면 어느새 여름이 오곤 했다. 이 봄날이 허망하게 가기 전에 영민이랑 꼭 밥 한번 먹어야겠다.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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