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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하고 알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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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하고 알싸한
  • 전민일보
  • 승인 2017.03.15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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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엔딩. 장범준의 포크가 생각나는 날이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얼핏 진부한 사랑노래 같지만, 이맘때가 되면 괜시리 귓가에 맴돌곤 한다. 아직 벚꽃의 끝을 노래하기에는 멋쩍으리만큼 싹이 움트기도 전인데 힘을 빼고 흥얼거리는 노래가 주는 묘한 나른함에 끌리는 것이다. 확실히 봄기운은 나른하다. 오죽하면 봄에 느끼는 피로감을 춘곤증(spring fatigue)이라고 부를까.

그래서 봄이 될 무렵이면, 조금 더 이불 속에서 뭉개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볕이 잔뜩 비치는 창가에 앉아 글을 몇 줄 읽다가, 졸리면 조금 졸다가, 작은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는 삶이 그저 평화롭다. 때로는 열심히 일하던 젊은 날이 그립기도 하지만, 봄기운이 다가오는 날에는 퇴직 후의 한적한 날들이 큰 선물로 느껴지는 것이다.

유난히 나른한 감상에 젖는 날이면 볕이 가장 잘 드는 거실창가에 자리를 펴고 앉아 마늘을 깐다. 딴에는 집안에 하나 있는 사내라고 부엌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설거지 하나로도 생색이 나지만, 이런 날에는 혼자 앉아 마늘 까는 일을 자청하게 된다. 마늘 한 소쿠리를 안고 칼을 들어 마늘쪽을 가르고 뿌리를 따고 껍질을 벗기고 있다 보면 어느새 볕이 져 가는 줄도 모르고 하얀 알토란을 모으는 데 전념하게 된다.

몇 시간이고 돌부처처럼 앉아 마늘을 까고 있으면 속 쓰리기만한 일상의 일들에서 잠시 벗어나게 되기도 한다. ‘옛날 어느 나라에’로 시작하여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 속 어느 미지의 공간처럼 치열한 현실은 없고 마늘의 알싸한 냄새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봄날, 내가 즐기는 마늘까기의 묘미이다. 어딘지 달콤해야 할 것 같은 봄맞이지만, 마늘의 알싸한 향도 내게는 봄 냄새로 꼽힌다.

그렇게 마늘을 깐다는 건 가장 평범하고 소탈한 일상이지만, 또 가장 낯설고 정연한 시간이 된다. 평소라면 생각만 해도 어깨가 아프고 좀이 쑤셔서 못 할 ‘마늘 까기’의 노동을 이토록 정성을 들여 소중한 생명이라도 얻듯 정결한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 그래서 마늘을 까는 일은 일상을 몇 줄의 글로 옮기는 일과 닮았다.

그저 굴러다니는 종이에 몇 자 적으면 되련만 속으로 몇 번이나 읽고 되씹는 재생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은 되려 질려버리기도 하고, 금세 표현에 대한 취향이 바뀌기도 하고, 방금 떠올랐다가 사라진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몇날 며칠 기억을 헤집기도 하는 글쓰기의 과정은, 그래서 봄날 알싸한 마늘을 소쿠리 하나 가득 까는 일처럼 설레는 중독이 된다.

따뜻한 햇볕에 잔뜩 나른해져 보기도 하고 직접 노래를 고르고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다가 졸기도 하다 보면 어느새 감상에 젖어 또 마늘 한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게 되는 봄날이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집을 쉼 없이 한 호흡에 읽고 난 것 같은 평화로운 피로감은 왠지 오늘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창작의 치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볕 좋은 오후, 오늘은 마늘 까기 대신 느린 걸음으로 노랫말이나 흥얼거리며 서점 나들이나 가고 싶다. 오늘의 감성을 잘 달래줄 책을 몇 권 골라올 수 있다면, 소파에 배를 붙이고 누워 좋은 글들을 읽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낼 상상에 남은 하루가 행복할 테다. 이렇게 예순 일곱의 나른하고도 알싸한 봄날이 올해도 시작되고 있다.

김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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