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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6.12.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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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 가까워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이맘때면 묵혀두었던 벼루와 붓을 꺼냈다.

그리고 주소록에 있는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떠올리며 덕담을 한두 문장 정도 써서 보냈다.

이 일을 하려면 맘먹고 하루쯤 날을 잡아야 했다. 잘 쓰지 못한 붓글씨지만 내가 쓴 시를 내 손으로 직접 붓으로 써서 보냈기 때문에 정성을 많이 들여야 했다.

그때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겼다.

그런데 벼루와 붓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시중에서 파는 성탄카드나 연하엽서를 사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겨우 핸드폰으로 정형화된 식상한 문자를 보낸 정도에 그치고 있다. 때로는 이마저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돌이켜보면 붓으로 글씨를 일일이 쓰느라 힘이 들었지만, 그때가 앨범에 간직한 흑백사진처럼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고 육체적으로 편안했던 것은 추억의 보자기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손편지를 쓰거나 받은 일이 언제였는지 오래 전 본 영화제목처럼 까마득하다. 여러 정보기기가 과거에 쓰던 필기구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요즘 손편지는 고사하고 이메일을 주고받기 어렵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어떤 기념일이나 명절 때 여러 지인에게 핸드폰으로 축하하거나 축복하는 글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대다수 문장이나 이모티콘은 벽돌공장에서 찍은 벽돌처럼 그게 그것이여서 식상하기 짝이 없다.

요즘 속력이 떨어진 것은 외면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삶은 풍경이 되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허전하다.

이런 속력은 우리 삶 전반에 파고들어 방향을 무시하고 빠름만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가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조차 없이 마음을 급히 먹고 달리다 보니,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사냥개에 쫓겨 기진맥진한 먹잇감 같다. 그렇다고 바삐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짚신을 신고 삿갓을 쓰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바삐 걷거나 달리지만 말고 각자 마음의 의자를 만들어 잠시라도 쉬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다른 사람을 측은하게 여긴 만큼 내 자신을 얼마니 측은하게 여겼는지? 다른 사람을 사랑한 만큼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한 만큼 스스로를 얼마나 격려하고 위로했는지? 내 몸 가운데 아프고 상처 난 곳은 없는지? 자기 몸이 무너지면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늘 급하게 서두르면 중요한 것을 잊을 때가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의 정자를 만들어 주위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자에 앉아 생각에 옷을 입혀야 한다.

생각에 언어의 옷을 입히면 시가 되고 반성의 옷을 입히면 성찰이 된다. 생각에 추억의 옷을 입히면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달처럼 뜨고, 용서의 옷을 입히면 마음에 쌓았던 담을 허물 수 있다.

생각에 배려의 옷을 입히면 얄팍하고 보잘 것 없는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10박 이상 날을 잡아 해외에 다녀오는 것만 여행이 아니다. 바삐 읽던 삶의 책을 덮어놓고 눈을 잠시 감는 것도 여행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지 않고 자정 이전에 잠드는 것, 오랫동안 전화 한통 하지 않고 지낸 사람에게 먼저 전화하여 안부를 묻는 것, 커피 한 잔 마시자 했는데 여태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밥 먹자고 전화하는 것, 어느 하루쯤 자동차를 세워놓고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것, 그러면서 차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표정을 읽고 창밖풍경을 그리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여행이다.

어느 한날 한시 시간을 뚝 잘라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는 것도 여행이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산책하는 것, 서점에 들러 책 냄새를 배부르게 맡는 것, 떠오르는 심상을 글로 쓰는 것,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옆에서 응원하겠다고 손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 통장에 잔고가 간당간당하지만 한 번은 내가 먼저 밥값 내는 것, 누군가 하는 유머를 듣고 배꼽잡고 웃어주는 것, 기분이 꿀꿀해지면 뒷산 나무들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고 웃으며 돌아오는 것, 이것들 역시 여행이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계획했던 일은 많았는데 이루지 못한 것이 더 많아 아쉬움이 크다.

올해 이루지 못한 것을 배낭에 집어넣고 내년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설레고 그 대상과 거리를 가깝게 해준다.

우선 여행을 떠나기 전 몇몇 사람에게 연하장을 보내야겠다. 예전과 같이 먹을 갈아 붓으로 쓸 엄두가 나지 않지만, 핸드폰으로 쓴 엽서는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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