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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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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돌이다
  • 전민일보
  • 승인 2016.11.09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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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여 옷깃을 곧추세우게 되는 날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리워 멀게만 느껴지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집 냄새가 그리워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집은 그저 상징적인 건물이나 공간의 개념이 아니다. 집에는 그 자체로 따뜻하고 어딘지 그리운 심상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니다. 난 젊어서부터 ‘집돌이’로 유명했다. 소문난 잉꼬부부도 공처가도 아닌, 그저 집돌이. 관외로 출장을 가게 되는 날에도 가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눈을 붙일지언정 숙박을 하고 오는 날은 거의 없었다. 위험해서 차라리 자고 오라고, 새벽에 오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더 불안하고 고단하다고, 가족들이 구박해대도 끄떡없었다. 고속도로를 한 걸음에 달려, 비로소 집에 들어올 때의 그 안도감. 그리고 집 냄새를 맡으며 누우면 아늑함이 온 몸을 감싸며 세상 편하고 위로 받는 기분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

집 냄새,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그것일지 모르지만 내가 느끼는 집 냄새에는 익숙함에서 오는 포근함이 있다. 그 포근함에는 집 밥이 차지하는 비중이 단연 크다. 아직도 전기밥솥을 쓰지 않고 매끼 압력솥의 칙칙 소리로 지어지는 새 밥과 멸치와 표고로 밑 국물을 정성스레 내는 아내의 찌개가 정겹기 이를 데 없다. 사실 나는 아내의 집 밥을 매우 좋아한다. 지인들의 경조사에 가서 식당에 앉아있다 오더라도 꼭 집에 와 집 밥을 먹고 마는 귀찮은 남편이다. 세상말로 노년에 가장 미움 받는 남자가 하루 세끼 다 집에서 챙겨먹는 이른바 ‘삼식이’라는데, 내가 바로 그 운 좋고, 나쁜 남편인 삼식이인 셈이다.

집밥에 목숨을 건다고 해서, 임금의 수라와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칼칼한 찌개와 고기구이의 조합이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집에서 편하게 먹기만 한다면 찬밥에 김치를 먹어도, 물에 만 밥에 멸치만 있어도 좋다. 웨딩타워 뷔페 홀에 넓게 자리한 각양각식의 음식들보다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먹은 밥 한 끼가 나를 자꾸만 집돌이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꼬장꼬장한 성격 탓에 주방에서는 매일같이 아내의 음식냄새가 한창이지만, 사실 집이 더 좋은 이유는 사람냄새에 있다. 어디에 가도 사람은 많지만, 내 집에 있는 사람만이 가장 특별한 법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보물 같은 자식을 낳고, 또다시 손자가 종종 놀러오는 내 집에는 아내와, 두 딸과, 하나뿐인 손자의 살 내음이 구석구석 묻어있다. 아이들과 함께했던 추억과 아내와의 특별한 기억들이 가득한 집기들을 버리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자꾸만 추억을 꾹꾹 담아 보관하게 되는 내 서재에는 그래서 자꾸만 물건이 쌓인다. 이제 그만 버리라는 가족들의 구박에도 잠시만 더, 하며 자꾸 정리를 유예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그 서재가 손자의 놀이터로 변해가고 있다. 막 말이 트여 세상 탐구에 여념이 없는 아이의 눈에는 마냥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장난감 가득한 제 집보다 내 서재가 더 신기한 모양이다. 오래되고 손때 묻은 책과 집기들, 장식장에 정리되어 있는 훈장과 상패, 그리고 잊지 앉으려 앨범에서 꺼내 놓은 추억 어린 사진들. 깔끔한 아내의 눈총을 오랜 시간 견디며 서재에서 숨죽여온 나의 잡동사니들이 새로 발굴된 보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조금 더 자란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하나하나에 기억되어 있는 살내음의 추억을 재미난 이야깃거리로 만들 잠시 뒤의 미래가 더 벅차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날이 춥다. 아내가 잘하는 뜨끈한 꽃게탕이 더 생각나는 날이다. 매일가는 가까운 길이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빨리 가서, 내가 좋아하는 집 냄새 속에 몸을 누이고 싶은 조바심이 난다. 매일 보는 얼굴들이지만 오늘도 나는 만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대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갓 지은 냄비밥이 없어도,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정성이 들어 있는 반찬이 없어도 좋다. 집의 공기결 사이사이에 흡습된 그간의 추억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은 아내 대신 내가 뚝딱뚝딱 김치찌개를 만들고, 아내와 아이 키우던 옛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 무렵 손자의 재롱을 전화기로나마 보는 그런 일상을 만들어 가야겠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집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아내가 지어준 별명대로, 나는 그저 행복한 집돌이다.

김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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