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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물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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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물러섬
  • 전민일보
  • 승인 2016.08.31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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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폭염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생태계가 교란되고 자연 질서마저 어긋나고 있다.

처서가 지났는데도 더위는 가을에게 바턴을 넘겨 계속 질주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하늘은 높푸르고 밤공기는 습도가 어느 정도 빠져나가 한여름보다 숨이 덜 막힌다.

매미소리 일색이었던 밤 공연도 풀벌레가 대신 나서고 있다. 이렇듯 여름은 뒷꿈치를 들고 달아날 태세를 보이고 가을은 눈치를 살피며 다가올 모양새이다.

이형기 시인은 ‘낙화’라는 시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했다. 이 짧은 시구에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화살표가 있다.

첫째,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그 때를 알면서도 자리에 연연하여 떠나지 않은 사람이 많다. 온갖 비리와 부정이 드러났는데도 높은 자리를 팽개치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나리들이 있다.

임기가 다해 일정한 자리에서 물러나야하는데도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종신’이나 ‘명예’라는 이름을 붙여 죽을 때까지 직을 유지하려고 떼를 쓰기도 한다.

단순히 이름만 내건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뒤에서 수렴청정하며 어떤 조직을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조직이 발전하기 어렵다. 모든 구성원은 그 사람 눈치를 보거나 그 사람 뒤에 줄을 서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조병화 시인은 ‘의자’라는 시에서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라고 했다.

둘째, 앞모습이라 하지 않고 뒷모습이라고 표현한 데 눈 기울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말없이 조용하게 물러서는 겸손함을 일컫는다.

높은 자리일수록 대부분 이임식이나 취임식을 거창하게 하려고 욕심을 부린다. 이런 자리는 대부분 사람을 많아 끌어 모아 놓고 축사에다 격려사, 환영사까지 하고 감사패나 공로패를 주고받는 요식행위 일색이다.

때가 되어 물러서야 할 때는 앞모습을 보이지 말고 뒷모습만 보이며 조용하게 떠나야 한다. 그래야 조직구성원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존경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국민이 싫어하고 문제가 있다며 물러나라고 하는데도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임명권자가 판단하여 물러서게 해야 한다. 그런데 본인은 버티고 임명권자는 귀를 닫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귀를 열었을 때 소통의 문이 되지만 닫으면 불통의 벽이 된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을 리더하는 사람은 조직원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국가지도자는 여론을 잘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연말이 되면 여러 직장과 공직사회에서 장이 바뀌면서 물러나야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연중이라도 자신이 맡은 임기가 다해 물러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비정신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선비는 구차하게 자리를 구걸하지 않았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하면 언제든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런저런 연줄을 잡으려고 하거나 힘 있는 사람에게 줄을 서려고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어떤 자리에서 물러서면 미련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기웃거리지 않았다. 이른바‘자기사람’을 심어 어떤 조직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떠날 때가 언제인가 분명히 알고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는 사람이 드물다. 떠나지 않으려고 생떼를 쓰거나 떠나더라도 요란스럽게 떠나는 이들이 많다.

거창하고 화려하게 퇴임사를 낭독하는 것보다 목례를 가볍게 하고 조용히 손을 흔들며 떠나는 사람이 더 큰 여운의 진폭을 남길지 모른다. 그런 사람이 몹사리 그리운 시절이다.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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