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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일보
  • 승인 2015.12.0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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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를 당해 불편해진 몸을 건조대에서 걷은 빨래처럼 침대에 널려두거나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아침 일찍 산책을 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상쾌하게 다가왔다.

산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산허리마다 요즘 부쩍 잦게 걸린 안개가 서로 몸을 섞여 식기에 다닥다닥 붙은 흰 쌀밥처럼 찰지다.

여전히 뒷목이 묵직하고 통증이 도사리고 있는 허리가 걸음을 뗄 때마다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 화심소류지를 향해 걸어가다가 길 한 가운데 예전에 보지 못한 돌멩이를 하나 발견했다. 몸이 온전한 날 같으면 등산화 콧날로 중심을 겨냥하여 발길질을 한 번 신나게 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그 돌은 온몸에 흙을 뒤집어 쓰고 주먹 반 정도 크기에 제법 둥근 모습이었다. 그냥 지나치려는 순간 로드 킬을 당한 짐승처럼 애잔하게 보였다. 돌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자 허리에 있던 통증이 다리 쪽으로 내려왔다. 앉듯이 자세를 낮춰 돌을 집었다.

돌에 묻은 흙을 털고 물에다 씻었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고 둥그스름했다. 그 돌이 살았던 고향은 길 위쪽에 있는 철쭉 밭이었다. 풀을 매던 옆 동네 김 씨 아저씨 부부가 호미끝에 걸려나온 것을 길로 내던진 것이다.

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번 굴리자 그가 살아온 이력이 보였다. 그는 나락농사 지은 것으로 명절 때나 제삿날이 되어야 식구들 쌀밥 한 끼 정도 먹고 죄다 수매하여 조합 빚을 갚아야 하는 가난한 집 논바닥에 탯줄을 잘랐다.

세상에 돌로 처음 태어났을 때는 제멋대로 생기고 편평했다. 소가 쟁기질을 할 때마다 소발굽에 밟혀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보습에 걸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어떤 해는 모내기를 하려고 써레질을 하던 주인 발끝에 발각되어 논둑을 파헤친 두더지구멍으로 감금되기도 했다. 이때 주인은 자신보다 몇 배 큰돌로 온몸을 내리쳐 두더지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때 반쪽이 되었다. 나락 농사짓는 것이 예전 같이 않아 하나하나 논을 묵혀두기 시작했다. 뼈 빠지게 나락농사를 지어 봤자 비료와 농약비, 트랙터 사용료를 주고나면 별 볼일 없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락농사 대신 너나 할 것 없이 나무 묘목을 심었다. 특히 철쭉을 많이 심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우리 지역은 철쭉 생산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아 ‘철쭉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주야로 기온차가 심하고 겨울기온이 시내와 두 배 정도 차이가 난다. 그래서 전국 어느 곳이나 우리 지역에서 기른 철쭉을 심어도 활착률이 높아 인기가 있다.

이렇게 논이 철쭉 밭이 되면서 돌이 처한 운명도 바뀌었다. 늘 논물에 잠겨 나락이 커가는 소리를 듣거나 두더지 똥내를 맡고 살았던 돌은 철쭉 밭에서는 덩달아 꽃나무처럼 살았다. 호미로 잡초를 매는 사람한테 들키지만 않으면 밭에서 쫓겨날 일이 없었다.

철쭉은 어린 묘목을 한 번 심으면 출하할 때까지 땅을 깊게 파헤칠 일이 없어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안전했다.

다만 몸이 호미 날에 찍힐 때마다 아프다는 것을 내색하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편평하고 뾰죽했던 몸이 둥글둥글해지기 시작했고 몸속에 철쭉 지문이 새겨졌다.

돌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것은 딱딱한 돌멩이가 아니라 꽃이었다. 그것도 한 송이가 아니라 여러 송이 철쭉이 군집하여 피어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한 송이만 달랑 피어 있으면 꽃도 외로워 보인다. 수많은 시간 동안 철쭉 밭에서 철쭉과 함께 살면서 철쭉을 닮은 것이다.

봄에 피는 철쭉을 가을이 오는 길에서 보았으니 횡재가 아닐 수 없다.

최재선 한일장신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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