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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생각하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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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생각하지 않는 삶
  • 전민일보
  • 승인 2015.02.24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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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칼럼니스트

 
2001년 한 여인이 자살했다. 주인공은 하네로레 콜(Hannelore Kohl). 그녀의 죽음이 언론 국제면에 등장한 것은 남편이 통일 독일을 만든 헬무트 콜(Helmut Kohl)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던 날, 세계는 화려했을 것 같은 퍼스트 레이디의 삶 저편에 숨어있던 어둠의 정체를 확인했다.

하네로레가 12세이던 1945년,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소련군에게 윤간(輪姦)을 당했다. 이 처참한 기억은 하네로레가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철저하게 그녀를 유린했다.

이 비극은 하네로레로 국한된 것이었을까. 2차 대전 당시, 소련 정부는 독일에 대한 약탈과 강간을 방조했다. 소련군 진격소식에 자살을 선택한 독일여성이 무려 5만 명에 이를 정도다.

하네로레도 그 수많은 피해여성 중 한 명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독일은 왜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에 대해 전범(戰犯)으로 규정하고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가. 단순히 독일이 패자(敗者)여서. 소련군의 만행은 결코 합리화 될 수 없다. 다만, 독일군에 의해 젖가슴이 잘려나간 소련 여전사의 피맺힌 절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교차를 가져왔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대비되는 장면이 있다. 제국주의 일본을 상대로 참승(慘勝)을 거둔 중국의 대응이다. 일본군의 만행과 그로인한 중국의 피해는 독일군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장졔스((蔣介石)는 항복한 일본군과 민간인에 대한 보복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분단의 고통도 복수의 칼날도 모두 피한 일본은 그런 점에서 ‘억세게 운 좋은 나라’다.

독일과 일본 그리고 소련과 중국은 자신들이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를 주고받은 관계다.

문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인 한국의 운명이다. 젖가슴이 잘린 소련의 여전사나 하네로레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아무런 귀책사유 없이 당해야 했던 한국사의 그 수많은 비극적 장면에 대해선 어떠한가.

이제는 드라마 속에서 흥미의 대상이 되어버린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탄금대(彈琴臺) 옥쇄’와 ‘삼전도(三田渡) 굴욕’이 비극적 역사의 전부라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하다.

역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비하라’고. 두 번의 전란(戰亂)을 통해 조선은 과연 무엇을 설명하고 미래를 설계했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제기된 조선 분할론은 구한말을 거쳐 마침내 3·8선으로 귀결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현지처와 병자호란 당시 조선 여인에 대한 성적 유린은 결국 일본군 위안부로까지 이어진다. 불편한가. 언급한 것은 비극적 실상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 한국은 현재 분단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남과 북, 모두 공감하는 것은 역사의 공유다. 비이성적인 북한의 태도를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단초(端初)는 역사적 경험이다. 남쪽에서 택한 방식 역시 북쪽과 방법론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인 종착지는 다르지 않다.

한국은 더 이상 새우가 아니다. 한국이 고래를 잡을 수는 없겠지만 고래가 한국을 먹겠다고 해서 그냥 당할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주할 상황은 아니다. 유득공(柳得恭)이 바라본 통일신라는 남북국(南北國)시대였다. 민족이나 국민국가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라는 것을 넘어 한국사의 비극은 발해(渤海)와의 통합에 실패한 때부터인지도 모른다.

“발밑만 보고 걸어다니란 말이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곳을 나갈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테니 말이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수용소에 갇힌 개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한국이 느끼는 자존감이 ‘토끼도 자기를 보고 놀라는 개구리가 있다고 좋아하는 것’만큼 허무한 자기기만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고민하지 않으면 또 다시 우리에겐 이것만이 남게 될지 모른다. ‘생각하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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