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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교두각시가 들려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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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교두각시가 들려주는 이야기
  • 전민일보
  • 승인 2015.02.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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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어머니는 이불홑청을 만들 커다란 천을 안방 윗목에서부터 아랫목까지 펼친 후 반으로 접었다. 일곱 살의 나에게는 아랫목으로 내려가 반으로 접은 천의 말미를 꽉 붙잡고 있으라고 이르고 어머니는 저만치 윗목에서부터 커다란 재단가위로 날렵하게 천을 자르면서 아랫목으로 점점 다가오셨다.

마침내 천의 말미가 잘릴 무렵, 나는 어머니가 실수로 내 손가락까지 자를 까봐 겁에 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절부절 손을 떨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익숙한 가위놀림으로 내가 잡고 있는 손끝까지 가위질을 하면서 천을 정확히 이등분으로 잘라내셨고, 가윗날은 달리기의 결승점인 천의 말미를 벗어나 공중을 향하여 완주의 만세를 부르며 경주의 휘날레를 장식했다.

일곱 살 배기 나의 눈에 어머니의 그 가위놀림은 싹둑 싹둑 가위질이 아닌, 쓰윽 쓰윽 가위타기 달인의 손처럼 보였다.

23년 전 내가 결혼할 당시 어머니는 나의 혼수품의 하나로 레이스로 장식된 네모난 반짇고리 속에 바늘, 실, 골무를 비롯하여 재단가위까지 챙겨 넣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 가위를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옛날의 어머니처럼 할아버지 할머니의 저고리, 바지, 두루마기 등을 만들려고 공단이나 옥양목을 마름질할 일도 없었고, 이불 홑청이나 아기의 누비이불을 만들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결혼 후 해본 바느질이라고는 나의 블라우스나 남편의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져서 단추를 달고 난 후 실을 자르는 정도였다. 그것도 색색의 실과 바늘, 그리고 작은 쪽가위가 들어있는 플라스틱재질의 작은 반짇고리가 따로 있어서 어머니가 주신 재단가위가 들어있는 그 반짇고리를 열어볼 일이 거의 없었다.

며칠 전 모처럼 장롱을 정리하다가 장롱 속에서 아주 오래 오래 깊은 잠을 자고 있던 그 반짇고리를 발견했다. 반짇고리를 열어보니 잊혀졌던 커다란 재단가위가 들어있었다. 그 가위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아니 이십여년 간의 세월이 만든 검붉은 녹을 금침삼아 잠들어있었던 나의 교두각시, 어머니의 분신이었다. 반짇고리속에 깨끗한 몸으로 편하게 누운 교두각시는 나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태초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을 독립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어. 어미와 연결된 탯줄을 자르는 도구로 사용되었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전설상의 제왕인 여와가 손에 가위를 들고 있단다. 나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한 생명이 스스로 호흡할 수 있게 된 것이지. 독립된 생명체인 나의 딸이여! 들어보렴, 나의 본명은 맞물린 칼, 교도(交刀)란다. 하여 살아가면서 나를 잘 다루어서 도(道)와 예(禮)가 아니면 가차 없이 잘라낼 수 있는 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해.

하지만 자비(慈悲)와 인(仁)과 박애(博愛)로 여유를 남겨할 할 부분은 심사숙고하여 조심조심 잘라서 삶의 마름질을 잘하기를 당부하고 싶어. 덧붙여 나의 상징인 가위표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단다.

정의가 아닌 곳에는 나의 상징 가위표 스티커를 부적으로 붙여야 하고 가족이나 벗이 혹여 잘못된 길에 접어들려고 하면 두 팔로 가위표를 만들어 그대의 온 몸으로 알려야 한단다.

나는 교두각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새삼스럽게 가위질 연습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반짇고리에서 교두각시를 꺼내어 찰칵찰칵, 사각사각 가위 소리를 내본다. 일곱 살 아이로 돌아가 가위를 놀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흉내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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