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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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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수첩
  • 전민일보
  • 승인 2015.01.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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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남 前전주 화산초 교장

 
조용한 아침이다. 할 일이 없어 책꽂이를 뒤적이다 빛바랜 수첩을 찾아냈다.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았고 땀에 젖었는지 잉크로 쓴 글씨가 번진 곳도 있다. 한 장 한 장 넘기니 옛일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얼굴을 떠올리며 더듬어 나가다 고향 선배의 이름에서 멈췄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간지가 10여년이 지났지만 정답던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 형과는 이웃마을 젊은이 여덟과 함께 위친계를 묻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종이로 상여를 꾸며 장례를 치르는 게 목적이었다. 아직 화장(火葬)이 없는 때라 상여로 운구하고 매장하는 게 상례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계원 가운데 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계원들이 모두 모여, 시장에서 상여의 골격이 되는 목재를 사오고 대나무로 상여의 뚜껑을 만들었다. 다음은 꽃을 만들어 장식하는 일이다. 수백송이의 국화꽃 모양을 만들어야 하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장례식 용품을 파는 가게에서 사온 재료를 펴 꽃을 만들었다.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서 밤새워가며 힘을 합했다.

상여를 만드는 일을 선배가 책임을 지고 지휘했다. 올바르게 이끄니 불평 한마디 하는 사람 없이 성의를 다했다. 다음날은 만장(輓章)을 한 사람마다 한 점씩 쓰고 종이돈도 찍어 만들었다. 준비가 끝나자 밤에는 빈 상여놀이를 했다.

여덟 명이 상여를 메고 구성지게 매기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떼는 연습을 했다. 매기는 사람이 요령을 흔들며 “가네 가네 나는 가네, 집을 두고 나는 가네.” 하면 받는 상여꾼들이 “어화 어화 어나리 넘자 어화” 한다. 박자에 맞춰 상여소리를 내니 발걸음이 맞았다. 호상이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구경했다.

삶을 마감하는 장례를 뜻을 모아 치렀으니 아름다운 추억이다. 형은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우리 민족이 겪은 모든 고난을 모두 안고 살았다. 어려서는 세끼 밥 먹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여 살림이 불어 아쉬움 없이 살았다. 사람의 목숨은 끝이 있기에 안타깝다. 한 평생이 긴 것 같아도 지나놓고 보면 아주 짧다. 형이 간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생각할수록 아쉽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정답고 좋겠는가.

형은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남을 흉보거나 헐뜯는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남과 다투거나 거짓말을 하는 일도 없으니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노래를 잘하여 동네잔치가 벌어졌을 때는 멋있는 가락을 뽑아 부러움을 샀다. 어려운 일이 있어 부탁하면 내일 같이 처리해 주니 동네의 해결사였다.

산천은 유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올 곧게 살다 간 형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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