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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칼럼 기고
icon 전민일보
icon 2014-02-28 18:55:28  |   icon 조회: 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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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더스트의 비밀
김한수 본보독자권익위원·전 삼천초등학교장


그 노부부를 만난 것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퇴직 후 소일거리로 시작한 아침 등산에 익숙해지며 슬슬 겨울산행에 대한 욕심이 생기던 차였다. 며칠을 눈길 좋기로 유명한 산을 수소문하고 장비를 갖추어 이제 겨우 산 중턱을 넘어설 무렵, 일기예보와 다르게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눈이 쌓일 것 같은 불안한 분위기에 모처럼의 겨울산행을 포기할까 싶어 고민할 때쯤, 내 옆에서 묵묵히 산을 오르던 한 노부부가 매우 반가운 얼굴로 반색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 또래쯤이나 되었을까, 눈이 반가울 리가 없는 상황에 아무래도 이상하여 자꾸 힐끔거리다 보니 목에 걸린 묵직해 보이는 카메라에 서로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며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혹 산행의 고수가 아닌가 하여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을 걸고 말았다. 눈발이 점점 더 굵어지고 있는데 이만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컸던 탓이다. 남자는 눈이 쌓이면 산행은 어려워지겠지만 자신들은 눈을 촬영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눈 소식이 반갑다는 것이었다. 벌써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말에 그들의 목적이 그저 설산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는 그것을 ‘다이아몬드 더스트’라고 불렀다. 아마 눈도 꽤 내릴 모양이고 마침 햇볕도 좋으니 오늘은 운이 좋으면 그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들떠 말했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 햇빛에 반사되는 것이 마치 다이아몬드 입자가 먼지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보이는 광경, 선택받은 사람만 볼 수 있다는 그 광경을 부부가 함께 보는 것이 평생을 함께 고생하며 서로의 손에 반지 하나 끼워주지 못한 세월에 대한 선물이라고 했다.

난 분명 세빙을 본 적도 없고 솔직히 그런 외래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왠지 그들을 따라가면 평생에 잊지 못할 멋진 광경을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설렘에 그들의 길에 동행하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불변의 사랑을 약속하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보석, 다이아몬드. 아직 다이아몬드 웨딩이라는 60번째 결혼기념일은 한참 남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으로 시작한 그 날을 기념하며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 사진으로 남기려는 그들의 삶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날, 그 노부부와 함께 정상에 올라 마주했던 끝도 없이 떨어지는 눈발 사이에 실제로 다이아몬드 더스트라는 것이 존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눈발이 거세 눈을 뜨기도 힘들었고 그저 어찌어찌 겨우 하산하고 나서는 손발이 얼어 며칠 열병을 앓았던 기억뿐이다. 그 노부부는 원하던 다이아몬드 더스트의 순간을 마주해냈을까.

가끔씩 삶의 순간순간들을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얼마 전 보았던 류현진 선수의 완투패 경기가 그랬다. 세계 최고의 빅 리그인 미국 메이저리그 다이아몬드 구장 가장 높은 곳에서 한 경기 내내 역투하는 류 선수는 맺히다 못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기를 연신 반복하고 있었고, 그의 열정과 승리에 대한 갈망이 브라운관 밖의 내게까지 공감되어져 함께 주먹을 쥐고 승리를 응원하던 참이었다.

내 응원에도 불구하고 류 선수는 피안타 2개, 8이닝 2실점의 기록으로 호투했지만 결국 타선지원이 없이 2:1 아쉬운 완투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온 몸을 내던져 흘렸던 그의 땀방울만큼은 내 눈에 세상 그 어떤 보석상의 다이아몬드보다 더 빛나고 값져 보였다. 그가 세계 최고 빅 리그 마운드에 올라갈 수 있기까지 흘렸던 그의 땀방울들이야 말로 승패에 관련 없이 그를 빛나는 선수로 만들어 준 다이아몬드 계단이 되어 준 것은 아닐까.

노부부가 알려준 다이아몬드 더스트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나는 그날 비록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찾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을 본 것 같았다. 그들의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삶의 순간을 찾기 위해 서로 손을 부여잡고 살아왔던 나날들이 하나하나 다이아몬드 더스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조각들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 노부부의 결혼기념일은 그날 실제로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만났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아름답게 기념되어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생을 살아가며 때로는 가난함에, 열등감에, 부족함에 남들이 가진 화려한 것들은 다이아몬드로 보이고 내가 가진 것들은 값어치 없는 돌덩어리로 보일 때가 있다. 힘들고 고달픈 하루와 내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가 야속하여 좌절할 때도 있고, 한번쯤 누구나 돌아볼 정도의 화려하고 빛나는 삶을 살아보기를 꿈꾸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광산에서 캐낸 탄소원소 집합체인 다이아몬드 원석보다는 하루하루를 묵묵하게 견디며 기쁘고 가치 있는 삶으로 뭉쳐낸 내 인생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보석일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나날들은 때로는 힘들고 거칠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다이아몬드 세공 따위가 필요 없는 하나뿐인 나의 실재, 그 존재 자체일 테니까 말이다. 눈 감는 날, 돌이켜 내 인생을 돌아볼 때쯤 내 하루하루의 삶의 조각들이 산 정상에 쏟아지는 다이아몬드 더스트처럼 아름답고 숨 막히는 환상으로 기억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2014.02.13
2014-02-28 18: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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